10주 - 입덧 지옥

by 화랑

임신 사실을 알게 됐을 때만 해도 아무 증상이 없었다. 가임력 검사가 아니었다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그런데 바로 다음날부터 뭔가가 시작됐다. 친구가 놀러 와서 고기를 구워 먹기로 했다. 평소 고기 누린내라고는 1도 못 맡는데(심지어 냄새가 좀 나야 맛있다고 생각한다) 갑자기 소고기 냄새가 역하게 느껴졌다. 느끼하고 구려서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다. 같이 먹던 친구도 나의 임밍아웃을 듣고 놀라 할말을 잃어서 눈앞에 소고기를 두고도 둘 다 먹지를 못했다. 다음 날 보리굴비를 먹으러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없어서 못 먹는 별미인데도 손이 안 갔다. 새콤한 김치나 장아찌만 당겼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지옥이 시작됐다.. 입덧에는 여러 증상이 있는데 희한하게 나는 그것들이 단계별로 지나갔다. 각각 어떻게 지옥이었나 나누고자 한다 ㅎ


1. 속 쓰림 (먹덧..?)

5주 차부터 냄새에 예민해지고, 입맛이 없고, 하루 종일 속이 쓰렸다. 속이 쓰려서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데 공복일수록 증세가 심해져 뭐라도 넣어야 했다.

[속 쓰려서 못 먹겠음 -> 안 먹으니까 더 쓰림 -> 그럴수록 못 먹겠음] 환장의 악순환이랄까.

특히 밤이 되면 더 괴로웠다. 쓰린 속을 붙잡고 2시간에 한 번씩 잠에서 깼다. 공복이 길어지지 않게 새벽에도 중간중간 뭘 먹어야 했다. 다시 누워야 하니까 소화가 잘되는 액체가 좋고, 차갑고 담백한 맛만 당겨서 주로 뉴케어(누룽지맛 단백질 음료)를 조금씩 나눠 마셨다.

이때만 해도 아이를 낳을지 말지 고민 중이었고 병원에서 입덧약을 받지도 않았다. 피곤한데 속은 쓰리고 잠은 못 자서 극도로 예민해졌다. 새벽 내내 거실 소파에서 부스럭대는 내가 걱정됐는지 눈을 비비며 나오는 남편에게 나는 울면서 애걸했다. 이건 아닌 것 같다고, 다음에 낳자고, 몇 년 뒤에 다시 갖겠다고. 그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다행히 입덧약을 복용하자 속 쓰림은 조금씩 나아졌다. 일단 한밤중에 계속 깨지 않아 살 것 같았다. 한두 번만 일어나서 뭐라도 주워 먹으면 괜찮았다. 다만 학교에서 버티기가 힘들었다. 도시락에 과일을 싸가서 몰래 먹을 때마다 눈치 빠른 아이들에게 발각됐다. “선생님 왜 뭐 먹어요?”라며 날카롭게 지적하는데 고학년이면 입덧에 관해 알려주기라도 하지 차마 1학년 앞에서 할 말이 없었다. 학생들이 배고프다고 징징댈 때면 '그래도 학교에 먹을 걸 가져오면 안 된다, 점심시간에 급식실에서만 먹을 수 있다'라고 가르쳤으니.. 선생님이 한 입으로 두말하는 것 같아 나중엔 연구실로 도망갔다. 쉬는 시간이 되면 냅다 뛰어가 식빵을 입에 욱여넣었다.


2. 메스꺼움 (입덧)

이게 메인이었다. 메스꺼움이라기보단 숙취+뱃멀미에 가까웠다. 정확히는 [전날 소주 5병을 맥주, 와인이랑 섞어마시고 -> 그다음 날 원양어선 탔는데 -> 다들 외국인노동자고 나만 한국인이며(외롭다는 뜻) -> 선장님이 죽어라 일 시키는(쉽게 피곤하고 지친다)] 느낌. 하루에 네 알씩 먹는 입덧약도 무용지물이었다. 9주에서 10주가 절정이었다.

그나마 숙취는 과음이 원인이니 반성이라도 하지.. 입덧은 도대체 무엇에 대한 벌일까.. 피임을 철저히 안 한 게 죄라면 죄겠지만 그게 이 정도로 심한 죄인지, 대체 이 모든 고통의 대가는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입덧이 심해지면서 병가를 쓰고 집에만 있었는데 마침 산전우울증까지 와서 무척 괴롭고 우울했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입덧수액을 맞으러 갔다가 끝나고 병원 건물 비상계단에서 토한 적도 있다. 아무도 없는 컴컴한 계단 구석에 주저앉아 비닐봉지를 붙잡는데 얼마나 서러웠는지 모른다.

다행히 몇 시간이 지나자 약효가 들었고 수액의 힘은 대단했다. 이후 입덧이 극에 달할 때마다 병원에 가서 마법의 물약에 의존했다. 그러나.. 어떤 간호사분께서 혈관 찾는데 실패해 양쪽 팔목을 멍투성이로 만들어놓으시는 바람에,, 더 이상 수액은 맞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도 멍이 시퍼렇게..


3. 체덧 / 토덧

11주쯤부터 양상이 바뀌었다. 하루 종일 메슥거리진 않는데 저녁이 되면 뭐가 얹힌 느낌이 들었다. 울렁울렁거리다 자기 전 꼭 구역질을 했다. 앞선 입덧 기간이 너무 괴로웠어서 차라리 이 시기는 버틸 만했다. 매일밤 한 번씩 토하는 것쯤이야 뭐.. 그마저 대부분 헛구역질이고 하고 나면 시원해지니 은근히 괜찮았다. 운수 나쁜 날은 헛구역질이 아니라 진짜 토악질을 했는데 토는 그렇다 쳐도 식도가 쓰라리고 아파서 힘들었다.

(잠시 비위 상함 주의)

한 번은 남편이랑 분위기 좋은 카페에 가서 청포도 에이드를 마셨다. 돌아오는데 뭔가 이상해서 재빨리 집에 올라갔고, 구역질을 하는데.. 사람이 코로도 토할 수 있음을 처음 알았다.. 콧구멍으로 청포도가 나올 땐 정말 끔찍했다. 으으..

문제의 청포도 에이드


몸무게는 47kg까지 빠지고 혈압은 90/50으로 떨어졌다. 여름 내내 어지럽고 기운이 없었다. 남이 찍어준 내 사진을 보면 하도 초췌해서 생경했다. 지팡이 들고 성질내는 할머니마냥 없는 힘을 쥐어짜내 챗GPT한테 화를 냈다. 죽겠다고, 대체 언제 끝나냐고. 착한 GPT가 14주 되면 끝날 거라며 나를 달래줬지만 도통 신뢰가 안 갔다. 엄마가 나를 낳는 순간까지 입덧을 했으니 나도 그럴 것 같아 좌절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AI는 정확했고 13주부터 슬슬 입덧이 없어졌다. 15주인 지금은 멀쩡하게 고기도 먹는다.

괜한 애한테 잡도리


입덧은 왜 하는 걸까

그렇게 두 달 좀 넘게 지옥에 있었다. 간절하게 바랐던 임신이라면 덜 힘들었을까? 영문도 모르고 임신해서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데 입덧까지 몰아치니 정신이 없었다. 보상이 없는 고통이라고 생각하니 더 괴로웠다. 그럼에도 장점이 있다면 몇 년 전 유방암 환자였던 엄마의 항암기간을 돌아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항암 부작용이 입덧과 비슷하다고 한다. 그때 엄마는 먹는데 무진장 까탈스러웠고 어떤 음식이든 한 입 맛보고 입이 쓰다거나 조미료 맛이 난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음식을 해줄 수도, 사주기도 어려워 병간호하는 게 피로했던 기억이 있다.

입덧 내내 그때가 떠올랐다. 원하지 않았네 어쩌네 해도 나야 내가 임신한 거고 애 때문에 입덧하는 거지만 엄마는 그야말로 봉변이지 않았을까. 죽음의 고비 앞에서 유일한 치료법이 항암인데 포기할 수도 없고 그 긴 기간 어떻게 견뎠을지 뒤늦게 안쓰러웠다. 몇 번의 항암 치료를 받고 병마를 이겨낸 엄마가 존경스러웠다.

그 와중에 엄마는 내가 먹고 싶은 게 생길 때마다 곧장 해다줬다.

그리고 또 하나, 편식하는 아이를 이해하게 됐다. 나는 워낙에 모든 음식을 좋아하고 향신료도 두루 잘 먹어서 편식하는 학생들이 이해가 안 갔다. 솔직히 이렇게 생각했다. '아주 배가 불렀지. 귀하게 자랐으니까 편식하지 굶고 컸어봐. 아무거나 잘 먹지. 아무리 편식하는 아이라도 아쉬우면 채소든 김치든 먹지 않겠어? 우쭈쭈 받아주니까 골라 먹는 거야.'

근데 그게 아니었다. 당사자가 되어보니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리 굶어도 아닌 건 아니었다. 내 의지를 떠나 된장찌개 청국장은 도저히 못 먹겠고 수박이나 체리만 들어갔다. 밥은 깨작깨작 쥐똥만큼 먹고 바로 디저트를 찾는 날 보며 기시감을 느꼈다. 급식실에서 보던 아이들과 똑같구나.. 1학년 애들이 나물 반찬엔 손도 안 대고 아이스크림만 먹는 이유가 있었다. 음식을 먹고 나면 부대끼고 텁텁해서 차갑고 달달한 걸로 내려주는 거였어..!

신생아도 마찬가지다. '애기들은 조금씩만 먹을 수 있으니 2시간에 한 번씩 밥을 찾는구나, 부모 입장에선 번거롭지만 아기도 본인 나름대로 애쓰겠네'하며 새벽수유까지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됐다.


이래서 입덧을 하는 게 아닐까. 융모성선 호르몬이니 뭐니 과학적 원인은 둘째치고 엄마로서 아이를, 더 많은 사람을 이해하고 품으라는 하늘의 뜻인 것 같다. 여자만 겪는 게 억울하지만 그래서 남자는 절대 모를 뭔가를 느끼고 배우지 않나. (물론 다 끝났으니 미화되는 거지만) 어쨌든 임신으로 나는 확장되어 간다. 전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훨씬 더 깊이.



이게 너무 땡겼는데 대전엔 파는 데가 없어서 못 먹었다.
초기엔 수박으로 겨우 버텼다. 여름에 입덧한 게 그나마 다행이다.
아빠가 갖다 준 유기농 체리! 너무 맛있었다
미운 네 살처럼 아이스크림만 먹었다.
아무것도 못 먹겠던 날 반찬을 종류별로 사와 한입씩..
희한하게 비싼 호텔 음식은 잘 들어갔다;;
아침엔 무조건 요거트! 덕분에 온갖 회사의 모든 요거트를 다 먹어봤다.
지나가다 명랑핫도그가 있길래 못 참고 사 먹었다.
토마토 살사가 너무 땡겨서 타코 시킨 날. 살사 많이 달라고 했더니 세 개나 주셨다. 사장님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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