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주 - 옷 정리와 부유방

by 화랑

남편과 나는 구축 소형 아파트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신혼집은 중심지에 위치해 맛집과 카페가 가깝고 무엇보다 대전의 자랑인 유명 베이커리가 근처에 두 개나 있어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우리에겐 딱이었다. 특히 서울 원룸에 살았던 나는 거실과 방이 분리된 가정집에 사는 게 감격스러울 정도였다. 이렇게 쾌적하고 넓은 공간이 내 집이라니.


그런데 아이를 낳기로 결심하자 멀쩡하던 집이 달리 보였다. 지하주차장이 아파트 동과 연결되어 있지 않고, 쓸데없이 베란다는 넓고 방은 작아서 아이 키우기에 불편할 것 같았다. 아기가 태어나면 당장 기저귀와 침대를 놓을 공간도 부족했다.


요즘 아기방 꾸미는 게 유행이던데 우리는 남는 방이 없으니 패스. 그럼 거실밖에 없다. 그런데 구축 특성상 집 구조가 3 베이, 4 베이가 아니라 거실에 모든 방이 옹기종기 붙어 있어 어딜 가든 거실을 지나야 한다. 아기가 거실에서 자고 있으면 볼일 볼 때도, 야식 먹을 때도, 밖에 나갈 때도 눈치 보일 게 틀림없었다. 아기의 편안한 숙면(표면적인 이유)과 우리의 사생활(본심)을 위해서는 분리된 공간이 필요했다.


안방, 옷방, 내 방 중에 하나는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내 방은 절대 없애고 싶지 않았다. 내 방은.. 서장훈보다 깔끔한 남편이 대놓고 포기 선언을 해 집에서 유일하게 더럽힐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자, 어렸을 때부터 모은 책이 벽 한편을 채우고, 당근마켓에서 업어온 15만 원짜리 모션데스크가 널찍하게 펼쳐진 나만의 천국이었다. 아침이면 나는 내 방에 들어가 (굳이) LP를 틀고 차를 마시며 잠을 깨웠고 자기 전엔 노란 조명 아래 일기를 쓰며 하루를 정리했다. 나에게 내 방은 취미 활동의 장이자 이직을 도모하는 작업실이었다. 아무리 내가 엄마여도 고작 1살짜리 아기한테 방을 양보하긴 싫었다. (모성애는 타고나는 게 아니다. 연구할 필요도 없이 나를 보면 안다.)


대신 옷을 포기하기로 했다. 내 옷을 절반으로 줄이면 빈 옷장이 생기고, 잘하면 옷방에 신생아 침대 정도는 넣을 수도 있다. 기저귀든 배냇저고리든 죄다 옷장에 집어넣고 옷방에서 아기를 재우자. 어차피 만삭에 가까울수록 배가 나올 테니 기존의 옷엔 손이 안 갈 것이다. 한숨 푹 쉬고 의지를 다지며 옷장을 열었다.


내 옷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교사룩과 반항룩.. 교생실습 때부터 모아 온 참하고 단정한 옷은 학부모 상담이나 결혼식 갈 땐 유용하지만 개인적인 취향엔 안 맞는다. 어쩐지 일터에서 입는 옷이라 작업복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친구들이랑 놀 때 '너 오늘 진짜 선생님 같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묘하다. 그래서 교사룩은 출근할 때만 입는다.


한편 재작년부터 나는 반항룩을 열심히 사 입기 시작했다. 교직에 크게 실망한 이후로 이상한 반골 기질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청개구리처럼 일부러 선생님들이 절대 안 입을 것 같은 옷만 입었다. 그래봤자 여전히 공무원 티를 벗지 못하고 진짜 힙한 언니들 앞에선 세상 얌전해지지만, 옷차림 하나로 은근히 기분이 전환됐다. 그렇게 늦바람이 난 나는 서른을 앞두고 미팅 가는 새내기가 입을 법한 옷을 사 모았다. 허벅지가 훤히 보이는 짧은 치마, 오프숄더 블라우스, 크롭티, 깊은 캡모자 등등.


그런 옷을 이제 정리해야 했다. 뭐든 애 낳고 손이 안 갈 옷이라면 매정하게 보내주기로 했다. 최대한 많이 없애야 그나마 공간이 생기고, 그래야 내 방을 지킬 수 있으니... 우선 배가 나오면서 불편해진 바지부터 치웠다. 청바지와 슬랙스를 몽땅 빨아서 박스에 넣고 옷장 위로 올렸다. 다음은 교사룩. 브랜드 옷이지만 대학 때부터 입어서 색이 바랬다. 안 그래도 매번 드라이클리닝 하기 귀찮았고, 내 취향도 아니니 가차 없이 내놨다. 앞으로 학부모 상담 때마다 한벌로 돌려 막기 하기로. 나는 상견례도 다 끝났고 남의 결혼식 때는 뭐 깔끔하게만 입고 가면 되니까 괜찮았다.


이제 반항룩 차례였다. 임신 중엔 물론이고 애 엄마가 되어선 더더욱 안(못) 입을 테니 버리는 게 맞았다. 만약 2년쯤 뒤에 입는다 치더라도 유행 타는 디자인이라 그때 가면 촌스러울 것이며, 옷감이 약해 청바지처럼 꾸깃 접은 채 상자에 넣을 수도 없었다. 드라이클리닝 안 하고 방치하면 색도 바랠 게 뻔했다.


그런데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다. 반항룩에는 다른 이름이 있었으니 바로 '자아실현룩'이었다.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 교사로서의 에고를 집어던지고 신나게 사제껴서 입은 옷.. 서울 곳곳 돌아다니면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긴 너를 어떻게 보내니.. 죽어도 못 보내.. 옷 하나에 추억과, 옷 하나에 사랑과, 옷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가슴이 쓰렸다. 다른 옷은 헌옷수거함에 넣거나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했지만 얘네는 그럴 수 없었다. 그쪽으로 가기엔 너무 아까운 애들이었다.


그나마 생각한 방법이 중고거래였다. 원하는 사람이 제값 주고 가져가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하나씩 앞뒷면을 사진 찍어, 정성스러운 글과 함께 당근에 옷을 올렸다. 안 팔릴 걸 알면서도 비싸게 책정했다. 똥값엔 팔고 싶지 않았다. 괜한 자존심이자 미련이었다.


그렇게 옷 정리를 하는 내내 마치 한 시절을 정리하는 기분이 들었다. 차곡차곡 쌓인 옷은 그 자체가 젊음 또는 패기, 이십 대 여자의 청춘이라거나 성적인 매력 같기도 했다. 그것들을 보내는 기분이 퍽 씁쓸했다. 그 와중에 겨드랑이에 뜬금없는 젖꼭지가 생겨 자존감은 더 떨어졌다. 임산부의 흔한 증상, 유선이 발달하며 부유두가 생긴단다. 아무리 인간이 포유류에 속해도 이건 너무나 원시적이라 황당했다.


이제 예쁘게 차려입고 나가 새로운 남자를 만날 일은 없겠구나 싶었다. 사실 그건 몇 년 전 결혼을 결심한 순간 이미 결정된 운명인데도 새삼스러웠다. 설마 바람피울 생각이었니? 아니잖아. 왜 이렇게 오버할까. 입덧과 우울감 때문에 유독 예민했던 걸 수도 있다. 그렇지만 결혼식날 수많은 하객 앞에 이 남자만 바라보겠다 선서할 때와는 기분이 달랐다. 그건 자발적인 의지이고 이건 상황에 따른 체념 같았다. 나는 몸이 변하고 옷도 정리하고 폭싹 늙는데 남편은 그대로다. 남편은 계속 같은 옷을 입고 배도 탄탄하고 몸도 안 상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 관계가 기울어질까? 성적으로 나를 봐줄 사람이 남편밖에 없으면 어떡하지. 내가 남편을 선택해서 평생 이 사람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임신하고 출산해서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사라지기에, 그래서 남편 아니면 안 되는 걸까 봐 낙담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니. 아이키나 허니제이는 애 낳고도 얼마나 매력적인데. 멋들어진 옷 맘껏 입고 여심도 남심도 사로잡는데. 아니 애초에 사람의 매력이란 게 외모에서만 오는 게 아니지 않나. 아이를 키우면서 깊고 단단해진다면 오히려 풋내기 스무 살 때의 나보다 더 매력적일 수도 있다. 잠깐만, 근데 매력이 왜 있어야 돼?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 안의 수많은 내가 언쟁을 펼쳤다. 쿨한 나, 소심한 나, 페미니스트인 나, 페미니즘 입에 올리기엔 한없이 부족한 나, 아직도 인기 많고 싶은 주책바가지 나, 애 엄마가 되어버린 나... 옷 정리를 마치고 옷장은 깔끔하게 비웠지만 머릿속은 더 지저분해졌다.




당근 잡상인
드라이클리닝까지 싹 해놔서 싸게 팔고 싶지 않았다
너도 안녕..

저 옷들 근황: 가디건은 팔렸고, 치마 두 개는 친구 줬답니다. 가방은 관심 누른 사람이 무려 25명인데 아무도 연락이 없어서 아직 집에 있어요.

혹시 아우로 백팩에 관심이 있다면.. 연락 주세요^^,,, 허허

깔끔하게 싹 치운 덕분에
세상 미니멀해진 옷장 (야구 굿즈는 포기 못함)

이것도 사실 치우려면 치울 수 있으니

여기에 애기 용품 몽땅 집어 넣겠다 이거예요

대신 내 방은 절대 보존 희망

가방 빼고 싹 보내줬다.. 젊음이여..

해쭈 이 영상을 봤을 때만 해도 정말 무섭고 임신하기 싫었는데.. 어쩌다 나도 4유두 당첨


브런치에 이런 것까지 공개한다니

제 사주에 망신살이 있는 게 분명하겠죠

푼수도 이런 푼수가 없다


옷 정리로 뭘 이렇게 유난이지? 싶다면 임신해보세여.. 입덧도 같이 해보시고.. 아 근데 덤덤한 임산부도 많긴 합니다ㅜ 저도 이런 제가 부끄러운데.. 그럼에도 냅다 글을 올리는 이유는 저같은 분께 공감과 위로를 드리고 싶어서예여,, 힘냅시다 임산부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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