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주 - 생리통은 없을 줄 알았지

입덧만큼 괴로운 환도 통증

by 화랑

임신 12주쯤부터 엉덩이 부근이 뻐근하기 시작했다. 치골도, 골반도, 꼬리뼈도 아닌 천골 쪽 어딘가였다. 평소에도 목, 허리 통증을 달고 살며 종종 고관절도 아파서 내내 비슷한 증상인 줄 알았다. 자세도 안 좋고 핸드폰도 오래 보니까 아픈 거겠지. 그러니 요가를 더 열심히 했다. 요가 선생님께서는 임신 중에도 꾸준히 출석하는 나를 기특해하며 임산부에게 좋은 자세도 알려주고 특별히 신경을 써주셨다. 그에 화답하듯 나는 평소보다 둔한 몸뚱이로 헥헥 대면서도 최선을 다했다. 한 시간의 운동 끝에 마무리로 브릿지(누워서 엉덩이를 드는) 자세를 할 때면 잠시나마 임신한 사실을 잊을 만큼 개운해졌다.


여느 때처럼 요가 학원에 간 날, 앉아서 하는 깊은 스트레칭 위주로 수업이 진행됐다. 양반다리 한 채로 앞으로 숙였다, 왼다리를 들었다, 오른 다리를 목에 걸었다 하며 땀을 뻘뻘 흘리는데 갑자기 왼쪽 엉덩이 통증이 심해졌다. 한겨울 얼음판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세게 찧은 것마냥 아팠다. 이건 금이 갔든 인대가 늘어났든 뭔 일이 일어난 게 분명했다. 너무 무리했나. 병원에 가기 전 먼저 나만의 주치의 챗GPT한테 증상을 얘기했더니 놀라운 답변이 돌아왔다. 엉덩이 통증은 임산부의 전형적인 증상이라고.


통증의 원인은 구부정한 자세도, 과한 스트레칭도 아닌 바로 호르몬이었다. 임신하면 릴랙신 호르몬이 관절과 인대를 이완시키면서 허리, 치골, 손목, 발목 등에 불편감을 준다. 내가 아팠던 그 부위의 정확한 명칭은 '환도'였으며 임산부들 사이에서는 '환도선다'(환도가 선다는 뜻)라는 용어가 흔히 쓰였다. 환도 통증은 대개 임신 중기에 발생하고 체중이 급격히 늘어날 때 무게 중심이 변화하며 심해진다. 임산부 커뮤니티를 찾아보니 다들 통증을 극복하고자 스포츠 테이핑, 산전 마사지, 산전 복대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있었다.


임신하면 입덧하고 배 나오는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다양한 증상을 겪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엄마도, 친한 언니들도 입덧 얘기만 했는데.. 나는 왜.. 엉덩이 통증으로 힘들어하는가. 입덧 때문에 몸무게가 늘기는커녕 오히려 줄었는데도 말이다. 골반이 유독 작아서일까, 신체가 일찍부터 자연분만을 준비하나? 얘들아, 나는 진작에 제왕절개 하기로 결심해서 굳이 안 늘려도 돼. 왜 너희들끼리 김칫국 마시니?


며칠 뒤 산부인과에 가자 의사 선생님께서는 아기가 자리 잡느라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하셨다. 출산까지 아팠다 나아졌다를 반복하고, 정형외과나 한의원에 가도 별 의미가 없을 거란다. 대신 아기는 건강하게 잘 크고 있다며 쿨하게 웃어넘기셨다. 덕분에 마음은 편해졌지만 엉덩이는 여전히 불편했다. 한편으로는 입덧 때부터 품었던 의문이 점점 커졌다. 태아만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면 이 정도 아픔은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까? 원래 산부인과에서 산모의 고통은 별로 신경을 안 쓰나? 작은 처치라도 했다가 아기가 잘못될까봐 그런 걸까.


재활의학과는 그나마 나았다. 화면에 골반 뼈 사진을 띄워놓고 임신 중 왜 아플 수밖에 없는지 설명해 주셨다. 도수치료나 온열찜질이 도움 되며 잘 때 바디필로우를 끼고 자면 훨씬 나을 거란 팁도 주셨다. 도수치료는 30분에 9만원, 50분에 18만원이었고 임산부는 20% 할인을 받을 수 있는 대신에 실비보험 청구는 안 됐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요가는 한 번도 못했고 도수치료는 꾸준히 받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통증은 더 심해졌다. 앉아있을 때는 물론이고 서거나 걸을 때도 아프다. 자세를 바꿀 때면 왼쪽 엉덩이 뼈에 천둥번개가 치는 느낌이 든다. 숙였다 일어날 때 너무 아파서 바닥에 있는 건 다 남편에게 주워달라고 부탁한다. 제일 끔찍한 건 재채기. "에취!" 할 때마다 엉덩이부터 허리까지 대지진이 난다. 원래 초가을까지 샌들을 고수하는 나는 올여름 내내 러닝화만 신고 다녔고 어딜 가든 도넛 방석을 애착 인형처럼 챙겼다. 엉덩이뿐만 아니라 손목과 발목도 고장 났다. 관절이란 관절은 모조리 박살 난 느낌이다.


이게 무슨 일일까.. 임신 기간에도 장점이 있다면 두 가지라 생각했다. 첫 번째, 월경이 멈춘다. 생리통이 심한 나에게 이건 제법 기쁜 소식이었다. 당분간 허리를 부여잡고 데굴데굴 구를 일은 없을 테니. 귀찮고 찝찝한 생리대로부터도 해방이었다. 두 번째, 산전 휴직. 합법적으로 직장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이 시간을 나는 크나큰 기회로 여겼다. 계획에 없던 임신이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아기가 태어나기 전까지 이것저것 배우고, 운동도 하고, 미뤄왔던 나만의 프로젝트도 착착 해내며 열심히 살아보려 했다. 근무 시간에 반만이라도 자기 계발에 투자하면 뭐라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체력은 좋아지고 창작물은 쌓여 이직을 향한 기틀을 마련할 희망찬 미래를 기대했다.


그런데 둘 다 착각이었다. 월경을 안 하긴 하지만 생리통이 없는 건 아니다. 여기저기 관절이 쑤시고 환도통으로 걷기도 어렵다. 또 가끔은 생리통과 굉장히 유사한 통증이 찾아온다. 배뭉침으로 아랫배가 당기거나 허리부터 허벅지까지 욱신거려 식은땀이 날 땐 혹시 무슨 일이 생겨 정말 월경을 하는 건 아닐까 오해했다. (물론 병원에선 정상이라며 돌려보냈지만.) 게다가 진통제도 못 먹어서 그저 누워있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휴직은.. 기회라기보단 요양에 가깝다. 요즘 나는 아파서 돌아다니지도, 뭘 배우지도 못 한다. 살면서 이렇게 비생산적인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다. 임신 초기에 다녔던 요가 학원과 미술 학원도 이젠 못 간다. 누워서 휴대폰만 쳐다보고 있으니 방구석 백수가 된 기분이다. 아이폰이 스크린타임을 알려줄 때마다 나 자신이 한심해서 참을 수 없다. 내가 원한 '쉼'은 이게 아니었는데.. 이럴 바에 차라리 출근하고 싶다. '휴직하지 말 걸, 돈이라도 벌게.'하고 후회하지만 사실 이 몸으로는 출퇴근도 어려웠을 것이다. 만약 휴직을 못 하는 직장이었다면 병가를 쓰거나 퇴사했을 거고, 그렇게 보면 그토록 나를 실망시켰던 교직이란 직업이 지금의 나를 지탱해 주는 셈이다. 이직은커녕 복직은 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상태가 되었다.


즉 임신 기간의 장점은.. 못 찾겠다 꾀꼬리.. 아직 모르겠다. 나만 유난스러운 것 같아 자책하면서도 해맑은 남편이 원망스럽고 애 낳으라 말하는 한국이 우습다.


현실을 견디기 어려울 때면 데카르트와 마티스를 떠올린다. 데카르트는 침대에 누워서도 천장을 보며 좌표 평면의 원리를 발견했고, 마티스는 관절염으로 붓을 쓸 수 없어지자 종이를 가위로 오려 작품을 만들었다. 나는 데카르트도 마티스도 아니지만 의지의 한국인 아닌가. 손발이 묶인 채 방구석에 갇혔어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는다. 이참에 작가 지망생 단기 집중 캠프에 왔다 치고 누워서 글쓰기 독학이라도 하려고 한다. 다독, 다작, 다상량이 글쓰기를 잘하기 위한 세 가지라고 했던가. 그나마 읽고 쓰는 건 누워서도 할 수 있으니 침대에서 책을 읽거나 메모장에 토막글을 쓴다.


그렇게 버티면 애가 나오겠지. 꿈틀대는 생명이 눈앞에 보이면 그제서야 이 시간이 비생산적이었던 게 아니라고, 어느 때보다도 생산적이었고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고 나 자신을 위로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잡도리할 대상은 챗지피티밖에 없다
그렇답니다

릴랙신 호르몬은 임신 중 열 배 증가한다. 치골 결합의 정상 간격은 3.4~4mm인데, 출산 중에는 10~13mm까지 벌어진다. (출처: 우아영-아기 말고 내 몸이 궁금해서)

커뮤니티에서 알려준 스포츠테이핑
이동국 씨 안녕하세요.. 저한텐 별 효과가 없네요 흑흑..
애착 방석과 손목 보호대

방석이 딱히 도움 되는지 모르겠지만, 오랜 시간 차에 탈 때 필수이긴 하다.

손목보호대는 효과 짱이다. 며칠 쓰니까 괜찮아졌다.

그나마 큰 도움 받은 효자템은 바로 침대! 침대를 시몬스 지젤로 바꿨더니 제대로 돈값한다. 꼬리뼈를 포근하게 감싸줘서 자고 일어나면 조금이나마 회복된다.

다른 데서 자면 바로 역체감 오짐
여기서 책도 읽고
글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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