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주 - 내가 아들 엄마라니 (2)

내 인생엔 남자가 없는데

by 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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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에 이어서..



내 인생엔 남자가 없는데


잠시 내 소개를 하겠다. 나는 여자 중학교, 공학이지만 철저하게 남녀분반이었던 고등학교, 교육대학교를 졸업해 초등교사가 되었다. 취미는 독서, 요가, 산책, 음악 듣기, 그림 그리기, 글쓰기다. 요가는 10년째 해왔다. 뜬금없이 TMI를 남발하는 이유는, 내 인생이 철저하게 여초 사회에서만 이루어졌음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학교도, 직장도, 취미도 여초다 보니 남자를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대학생 땐 과내 성비가 8:2 쯤 됐고 그중 2에 해당하는 남자 애들과 꽤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4학년 때 과내 단체 성희롱 사건이 불거지는 바람에 모두와 절연했다. (뉴스에도 나올 정도의 일이라 도무지 우정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니 내 인생엔 남자가 없다. 남편, 아빠, 사촌오빠 빼고. 이제 여기에 한 명이 더 추가될 예정이다. 아들...


당장 내년부터 나에겐 아들 엄마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생긴다. 중한 역할을 등에 짊어지자 불현듯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됐다. 나의 성격, 취향, 인간관계를 '아들 엄마'라는 관점에서 보니..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바로 내가 지독한 '여미새'라는 것. 언젠가부터 나는 나만의 독특한 세계관에서 살아왔다. 여성의,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아마조네스 21세기 버전에서.

여초 인생 요약.jpg



뜨거웠던 20대 초반


내가 대학에 입학한 해 5월, 강남역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나는 바로 옆 교대역에서 학교를 다녔고 범행 장소가 위치한 골목도 수시로 오갔던 터라 그 일이 굉장히 생생하게 와닿았다. 입시에만 전념하던 청소년기와 다르게 시간적, 정신적으로 여유로운 데다가 시의성과 공감대까지 있으니 사건의 개요부터 그 후에 이어진 추모의 물결, 온라인으로 번진 성별 갈등까지 열심히 추적했다.


그러다 페미니즘에 꽂혀버렸다. 하필 2016년도에 그곳에 있어서였을까. 아니면 어렸을 때 겪은 일로 비슷한 트라우마가 있어서? 사당역에서 "어이 거기 핫팬츠!"라고 성희롱을 당해서? 이태원에서 돈 줄 테니까 자기랑 놀자던 할아버지를 만나서였을까? 모르겠다. 확실한 건 20대 초반 여대생의 설움과 분노를 설명하기엔 페미니즘만 한 게 없었다는 것이다. 직접 겪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페미는 거르니 어쩌고 가볍게 말하지만 당시 나에겐 그 정도의 무게가 아니었다. 나는 전공보다 여성학 공부를 더 열심히 했고 틈날 때마다 관련 책을 읽었다. 주말엔 합정에서 북토크를 듣고 평일엔 서울대에서 여성과 문학 과목을 청강했다. 학점 인정도 안되는데 굳이 모르는 교수님께 찾아가 꼬박 개근하고 과제까지 다 제출했다. 가장 젊고 뜨거운 시절을 그렇게 보냈다.


시간이 흘러 직장인이 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는 서서히 변했다. 우선 다양한 일을 겪으며 세상엔 '좋은 남자'도 '나쁜 여자'도 많음을 몸소 깨달았다. 또 여초 사회에만 나를 집어넣다 보니 성희롱이나 성차별을 겪는 일이 전보다 줄었다. (홍대 이태원엔 발을 끊고 요가원, 미술학원만 가니까..) 이십 대 초반의 테마가 '여성으로서의 나'였다면 언젠가부터 '교사로서의 나'가 더 큰 부분이 되었다. 안 그래도 먹고사는데 급급해 사회 현안에 신경 쓸 그릇이 작아졌는데 그마저도 교권 문제로 채우니 남는 자리가 없었다. 그 와중에 대학생 때의 내가 반역(?)이라 여겼던 결혼까지 해버려 차마 페미니즘을 입에 올리기도 부끄러워졌다.



그러나 여자 사랑은 뿌리 깊게 박혀버려서..


그렇게 페미니즘이랑 멀어진 줄 알았다. 여전히 이틀에 한 번꼴로 교제 살인이 일어나고 정권이 바뀌어도 높은 자리는 다 남자가 하는 이 나라에서, 성별 문제를 멍하니 지켜만 보고 있으니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부를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들 키우기라는 신박한 과제가 주어지자 그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나에게 페미니즘은 사회 운동을 넘어 삶의 일부라는 걸.. 아주 오래된 취향이자 습관으로 자리 잡아 의식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봉준호, 박찬욱 작품 통 틀어서 딱 하나 봤다. 마더. 여성과 문학 과제였다. 반면 그레타 거윅한텐 환장을 한다. 유재석보다 박미선 장도연이 좋고 할리우드 코미디언은 잘 모른다. 대신 티나페이랑 케이트맥키넌 개그엔 배를 잡고 웃는다. 인생 드라마는 선덕여왕. 특히 미실과 덕만이 논쟁하는 장면을 줄줄 외우고 비슷하게 도둑들 속 펩시vs예니콜, 더글로리 문동은vs박연진 대사는 지금 당장이라도 완벽하게 더빙할 수 있다.


나에게 문학이란 박완서, 박경리로 시작해 은희경, 양귀자, 신경숙으로 이어지고 정세랑, 최은영, 김초엽이 날아다니는 예술이다. 여성 작가가 여성의 삶을 핍진하게 그려내 선물 상자에 담아주면 그걸 받은 독자는 애틋하고 경이로워서 우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나 김훈 책은 읽은 적이 없다. (일부러 피한 건 아니다.. 아 박상영 작가는 진짜 좋아한다.)


케이팝도 마찬가지. ‘솔로 가수‘하면 여자들만 떠오른다. 김완선 엄정화 이효리 보아 아이유 태연 제니. 남자는 비 아님 박남정 정도..? h.o.t.랑 젝스키스에 관심 가진 적 없고, ses 핑클 노래는 아직도 듣는다. 그리고 베이비복스. 내 영원한 언니들이다. 사랑해요 베이비복스.. 이기찬보단 이수영, 정승환보단 권진아다. 7080은 나미와 이상은!

내가 여자를 밝힌 게 아니라
여자들이 밝은 거예요


학창 시절 2pm덕질을 그렇게 했어도 이제 그들을 보면 그때의 추억이 떠오를 뿐이다. 중학생 때 재밌었지~ 가 끝. 반면 원더걸스는 첫사랑 같다. 어린 나이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괜히 애틋하고, 잘 커줘서 고맙다(?). 카라가 오랜만에 컴백했을 땐 벅차서 울었다. 진심으로 다들 행복했으면 좋겠다. 방탄소년단과 NCT도 좋아했지만 그들을 볼 땐 누가 더 잘하고 잘생겼나에 집중했다. 근데 레드벨벳 노래는 들을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 웬디가 예쁘든 말든 상관없다. 평생 그녀를 지켜주고 싶다. (물론 웬디는 항상 예쁘다.)


스우파를 볼 땐 단전에서부터 감동이 끓어올랐다. (남자 버전은 안 봤다) 즐겨 듣는 팟캐스트마다 죄다 여성 진행자고, 야구 볼 땐 욕하는데 여자배구 볼 땐 오열한다. 김연경 박정아 언니 때문에 여러 번 눈물 닦았다.


모든 게 이런 식이다. 언제부터 이랬는지, 어디서부터 의도된 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페미니즘 하곤 상관없을 수도 있다. 선덕여왕 베이비복스부터 시작된 뿌리 깊은 여자 사랑을 누구 탓으로 돌리랴.. 그냥 여자가 좋다. 여자들이 뭘 하면 응원하게 되고, 닮고 싶다. 심지어 현실에서도 매력적인 여성을 보면 자꾸 눈이 가고 어딜 가든 리트리버처럼 새로운 여자와 친구가 된다.


이러니 아들에게 뭘 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랑은 많이 주겠지만 과연 아이와 나 사이에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까. 교사로서 남학생들과 친밀하게 지냈던 이유 중 하나는 수업이라는 매개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업 재밌게 준비하고, 피구 야구 배구 종류별로 시켜주면 아이들은 금방 마음을 여니까. 그러나 엄마로서 아들을 키우는 건 다른 일이다. 딸이랑 그림 그리고 문구점 가는 건 상상이 가지만 아들과 함께하는 미래는 잘 그려지지 않는다. 지독하게 여초 사회에만 있었던 내가 남편과 아들로 이뤄진 가정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도 아직은 막막하다. 아들이 성인이 된 후도 마찬가지다. 솔직히 자신이 없다. 나에겐 치명적인 문제가 한 가지 더 있기 때문이다. 나는 2030 남성이 어렵다..



2030 남성이 어렵다


여기서부터 다음 글로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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