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생이 부러운 임산부의 일상
요즘 나의 일상은 단순하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해 주고 다시 누워 휴대폰을 본다. 졸린 눈으로 SNS, 쇼핑몰, 브런치, 연예 뉴스까지 한 바퀴 돌고 나면 슬슬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한다. 메뉴는 늘 똑같다. 낫토. 매일 먹어도 적응 안 되는 이상한 음식을 억지로 먹는다. 각종 염증을 달고 사는 나에게 한의원에서 의무로 정해준 식단이기 때문이다. 아침엔 낫토와 플레인 요거트를 드세요. 짧지만 분명한 지령을 따른 뒤 정말이지 건강해졌고 (원치는 않았어도) 임신까지 했으니 충성하는 수밖에. 달고 매운 음식은 뭐든 금하라는 지령도 받았지만 그건 지키기가 어려우니 대신 낫토라도 꼬박꼬박 먹는다. 끔찍한 맛을 희석하고자 곁들인 쯔유와 겨자는 아침잠을 번쩍 깨운다. 그걸 또 희석하기 위해 요거트를 마신다. 접시를 다 비우면 수고한 나에게 보상을 준다. 껍질 벗긴 무화과 한 알. 말캉한 식감에 담백한 단 맛이 아침의 유일한 낙이다.
미끈거리는 낫토 그릇과 꾸덕해진 요거트 컵은 바로 닦아야 한다. 뽀득뽀득 설거지를 마치면 집 청소 시작. 돌돌이로 대충 머리카락을 치우고, 물걸레 청소포로 바닥을 민다. 그러곤 거실로 돌아와 유튜브를 켜고 초간단 필라테스를 따라 한다. 말 그대로 초간단이다. 제목부터가 '7분 홈트'인 데다 임산부가 할 수 있는 건 앞부분뿐이라 다 해도 5분이 채 안 된다. 그래도 은근 시원하다. (실은 선생님이 독특해고 요란해서 좋다.)
https://youtu.be/PAXddkGfd84?si=zkX72-MF8NHT2dHt
다시 휴대폰을 본다. SNS, 쇼핑몰, 브런치, 연예 뉴스… 아침에 본 소식 그대로다. 세상 돌아가는 속도에 비해 내가 지나치게 휴대폰을 많이 한다는 뜻이다. 채팅방도 조용하다. 친구들은 다 출근해서 일하는 중이니 당연하다. 나만 백수구나. 왠지 씁쓸해 책상에 앉는다. 공책에 오늘 날짜와 할 일을 적고, 스티커도 붙인다. 잠시 책을 읽고, 필사하고, 글을 쓰다 보면 금세 엉덩이 통증이 시작된다. 그럼 침대에 누워서 또 휴대폰. 그래도 이번엔 방금 하던 작업을 모바일로 이어가려 애쓴다.
여기까지가 오전 일과다. 백수의 하루가 이렇게나 길다. 이제 점심을 차려 먹으며 <내 남자의 여자>를 본다. 명작이다. 김수현 작가는 셰익스피어고 배종옥 배우는 연기 천재다. 드라마 속 김희애를 욕하고 김상중을 저주하고 하유미를 찬양하다 슬슬 밖에 나갈 준비를 한다. 목적지는 집 앞 카페. 원래 나는 예쁜 카페를 찾아다니는 일에 진심이었다. 쿠폰도 모으고, 사진 찍어서 SNS에 올리고, '대전은 카페의 도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만들어 외치고 다녔다. 임신 중에도 카페 투어나 신나게 하리란 기대가 있었는데.. 힙플레이스에는 대가가 따랐으니.. 커피도 못 마시는데 감각적인 인테리어일수록 오래 앉아있기가 불편해서 집에서 가까운 저가 프랜차이즈 카페만 가게 됐다. 멋스럽진 않아도 의자가 푹신해서 좋다. 차가운 얼그레이티에 집에서 챙겨 온 레몬즙 한 포를 넣어 섞어 마신다.
흔한 프랜차이즈 카페지만 사실 이곳은 내게 매우 특별한 장소다. 10년 전 다녔던 재수학원 건물 1층에 있기 때문이다. 상담실이었던 공간이 분리되어 카페가 되었다. 화장실에 가려면 재수학원 카운터를 지나야 하는데, 그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스무 살,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절을 보낸 장소에 임산부가 되어 다시 찾아올 줄이야. 여길 벗어나겠다고 아득바득 공부해 상경했으면서 하필 신혼집이 바로 앞인 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람.
카페 주 고객층도 재수생들이다. 자습실 같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다들 인터넷 강의를 듣거나 시험지를 푸느라 바쁘다. 앳된 얼굴로 고생하는 모습이 안쓰럽다가도 한편으론 부럽다. 어른의 인생에도 모의고사가, 해설지가, 1타 강사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요즘 나는 문제 풀이만 주구장창 하고 채점은 못하는 답답한 시기를 보내는 것 같다. 임신 20주 차지만 아직도 얼떨떨하고, 여기저기 아픈데 뾰족한 치료법이 없어 그저 누워만 있고, 이 시간을 이렇게 보내도 되는지, 다른 임산부들은 직장 생활도 하고 태교 여행도 가는데 나는 왜 이러는지, 그나마 하는 일이라곤 글쓰기뿐인데 내 글이 괜찮긴 한 건지, 꾸준히 쓴들 나중에 뭐가 남긴 할지 죄다 모르겠다. 재수할 때처럼 현재의 내가 임산부로서, 예비 엄마로서, 작가 지망생으로서 정확히 몇 등급인지 알고 싶다. 부족한 게 있다면 그게 뭔지, 발전하기 위해 뭘 해야 하는지도 누가 딱 가르쳐주면 좋겠다. 비슷한 처지의 친구랑 서로 얘기도 들어주고, 모르는 것도 물어보며 의지하고 싶다. 그렇게 치열하게 몇 달을 보내면 모든 게 다 끝나고, 좋든 싫든 결과를 받아들인 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싶다.
써놓고 보니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진 한국인의 전형 같아 부끄럽다. 재수생까지 부러워하다니 가지가지하는구나.. 누군가는 이런 한가로움을 간절히 원할 텐데 백수의 기만 아닌지..
*다음 글에 이어집니다.
*다음 화에선 이런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몇 가지 방법을 적어볼게요!
끝으로 저의 임신 일기를 봐주시는 여러분 감사합니다.. 덕분에 단조로운 일상에 큰 힘이 되어요. 브런치가 참 좋은 게 독자분들이 다 따뜻하시더라고요. 종종 달리는 댓글을 보면 고맙고 감동적이라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