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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에 이어서-!
정작 바쁘게 살 땐 이런 순간을 간절히 바랐다.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내 에너지를 온전히 나를 위해 쓰고 싶었다. 최근 몇 년간 나는 늘 기진맥진했다. 신규 교사라 적당히 하는 법을 몰랐고 일터에 모든 걸 쏟아버렸다. 서울에서 홀로 사는 것도 힘에 부쳐서 퇴근 후에도 제대로 충전이 안 됐다. 낮이고 밤이고 디멘터들에게 기운을 뺏기는 기분이었다. 해가 갈수록 밑바닥까지 소진되어 몸도 마음도 고장 나버렸다. 휴학한 청춘, 워킹홀리데이 간 친구, 퇴사한 유튜버… 누구든 일을 안 하면 그저 부러웠다.
그때의 내가 이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까. 출근도 안 하고 침대에 누워있으니 부럽겠지. 안 그래도 창작자로 사는 게 꿈이었으니 아싸 차라리 잘됐다고 할 테다.
그러나 요즘 나는 막막하고 외롭다. 자본주의 사회에 일을 안 하니까 나라는 사람의 생산성을 의심하게 되고, 밖에 잘 못 돌아다니고 집에만 있으니 마치 코로나 시대로 돌아간 것 같다. 하루에도 몇 번씩 햇빛과 먹구름이 머리 위를 오간다. 고요한 아침이 감사한 한편 적막함에 헛헛하다. 바쁜 사람들 사이에서 묘한 우월감이 들다가도 이내 그들이 부러워진다. 학교로 돌아가긴 싫지만 수업은 하고 싶다. 사회생활, 직장 생활이 그립다.
이렇게 우수에 젖어있으면 어디선가 냉철한 자아가 등장해 나 자신을 나무란다. 너라는 사람은 이래도 저래도 불만이구나. 천국에 데려다 놔도 징징댈 거지? 그럼 또 다른 자아가 쭈뼛거리며 변명한다. 그렇지 않아. 하기 싫은 일을 안 하고는 있지만 대신 하고 싶은 것도 못하잖아. 내가 원한 자유는 이게 아니야. 방구석 백수가 되길 바란 적은 없었다고. 직장에서 벗어나면 뭐라도 배우고, 만들고, 사람 만나고, 여행 다니고 싶었어. 다른 일을 찾아도 좋고. 그래서 교사를 관두네 마네 했던 거야.
맞다. 활기찬 휴식과 답답한 요양 사이엔 간극이 있다. 쉬고 싶었다 한들 이런 방식을 원한 건 아니다. 운동도 하고, 글쓰기도 배우고, 인터뷰집도 새로 만들고 싶은데, 아님 차라리 일해서 돈이라도 벌든지. 근데 다 못하니까. 그리고 그 이유가 임신에 따른 신체적 한계 때문이라 무력하다.
언제까지 쳐져있을 순 없는 법. 이럴 때마다 상담 선생님께서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다.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매몰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 보세요. 이 상황에서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바뀌어야 먹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들까? 남은 임신 기간을 보다 즐겁게 보내기 위해 몇 가지 방법을 찾아냈다.
임신 초기엔 입덧, 다음엔 환도 통증으로 두 손 두 발이 묶여버린 나. 조금만 무리하면 금세 체력이 고갈되고, 생리통과 유사한 통증이 찾아올 땐 꼼짝없이 누워야 한다. 그러다 보니 태교 여행은커녕 친구를 만나거나 운동을 가지도 못하고 칩거 은둔 생활 중인데... 놀랍게도 이런 고립된 삶, 단순하고 지루한 일상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다. 나에겐 견디기 힘든 옥살이가 누군가에겐 흔쾌히 떠나고 싶은 여정이라니 흥미로웠다.
어느 날 악동뮤지션이 같이 살게 됐다며 팬들에게 중대발표(?)하는 영상을 봤다. 나이 들기 전 팀워크도 다지고 음악 작업도 많이 하고 싶어 합숙을 시작했단다. 10년 간 살았던 합정은 너무 번화가라서 자연친화적인 곳으로 이사했다고, 그곳에서 서로 감시하고 옥죄며 훈련소처럼 산다는 말이 인상 깊었다. 누구보다 화려하게 살 수 있음에도 되려 반대쪽을 선택하는 그들을 보며 어쩐지 나도 겸허해졌다.
https://www.youtube.com/watch?v=xqqtfIssKmM
곧이어 알고리즘은 요가 수련을 위해 인도로 떠난 젊은 여성의 영상을 추천했다. 배경음악과 영상미가 뛰어나 브이로그보단 독립영화 같았다. 제이드라는 이름의 그녀는 앳된 얼굴과 달리 무척 어른스러웠다. 인도 수련원에 홀로 머물며 매일 요가하고, 일기 쓰고, 명상하는 모습이 경건하고 충만해 보였다. 영상 제목이기도 한 <삶에서 의도적 고립이 필요한 진짜 이유>를 그녀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여러분 진짜 중요한 게 뭔지 아세요? 내 기준을 만드는 거예요. 세상에는 수많은 기준이 있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선 높은 연봉, 안정적인 직장이 성공의 기준이지만 요가의 세계, 예술 업계에서는 또 다르단 말이죠.
이 기준들 중에서 어떤 걸 거부하고 어떤 걸 가져갈지 선택하는 힘이 의도적 고립에서 나와요. 기존에 속해있는 집단이나 인간관계 안에서 같은 일만 반복적으로 하다 보면 그게 힘들어요. 매너리즘에 빠지고, 익숙한 편안함만 찾고, 그렇게 그냥 흐름대로 살게 되죠. 저는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쉼표를 딱 찍고 은둔을 시작했어요. ‘이게 맞나?', ‘내가 원하는 건 뭘까?’ 같은 생각을 할 공간과 시간이 필요했거든요.
고립됐을 땐 누군가에게 인정받거나 뭔가를 입증할 필요가 없으니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매일 마주하게 돼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게 편해지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생기죠. 이게 인생을 살아가는 힘의 근간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한 번쯤은 완전히 고립된 채로 은둔 고수가 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어요.
무릎을 탁 쳤다. 눈물도 찔끔 났다. 너무도 맞는 말이라서. 우리나라는 특히 성공의 기준이 다소 획일적이어서 넋 놓고 살다 보면 파도에 휩쓸리게 된다. 조언을 가장한 잔소리를 듣다 보면 불안과 공포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대출받아 집 사서, 갈아타기 해서, 강남에 입성하지 않으면 바보가 되는 것 같고, 자아실현을 위해 공무원을 관두면 인생이 망할 것 같다. 특히 육아의 세계에선 그게 더 심해서 유명한 육아 용품을 사지 않으면, 무슨무슨 교육을 하지 않으면, 어떤 학원에 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압박이 엄마들을 자극한다. 이런 사회에서 아이를 낳기 전 나만의 기준을 정립하는 건 얼마나 귀한 기회인가. 서른을 맞아 온전히 고립되어 나를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지 집요하게 탐구하는 시간이 마련되어 얼마나 감사한가.
제이드심은 인생의 변곡점마다 완전히 혼자였다. 고등학교를 자퇴했을 때도, 코로나로 갇혔을 때도 원기옥을 모으듯 뭔가에 몰입했다. 그렇게 고등학생 때 시작한 프로젝트가, 코로나 때 선택한 진로 전환이 현재까지 이어져 지금의 그녀를 만들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slkKVuE_QA
왠지 나도 뭔가 할 수 있겠단 용기가 생겼다. 물론 좀 더 고민이 필요하다. 단지 침대에 누워서 휴대폰 하는 걸로는 창작도 성찰도 이뤄지지 않을 테니까. 다만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을 강제가 아닌 자율이라고, 모든 게 내 선택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합정역을 버리고 구석으로 들어간 악동뮤지션처럼, 인도에서 묵언 수행을 하는 제이드심처럼 나 또한 어떤 수련이나 캠프에 일부러 찾아왔다고 상상해 본다.
-작가 양성 스파르타 캠프: 당신에게 허락된 건 오직 읽기 쓰기 뿐! 잠자코 독서와 글쓰기에 매진하세요.
-집에서 하는 템플스테이: 인생 재정비를 위한 자발적 고립. 법륜스님 유튜브와 함께합니다.
-나영석 예능 체험권: 삼시세끼와 여름방학을 인상 깊게 보셨다고요? 그럼 따라 해보세요. (대신 본인 집에서)
-글로 배우는 육아: 아이 낳기 전 마지막 기회! 방에 틀어박혀 갖가지 책을 읽고 나만의 육아관을 정립하세요.
이름이야 얼마든지 더 붙일 수 있다. 여름성경학교, 가을명상학교, 겨울드라마학교 등등. 내가 원했던 상황이라 가정하면 고립과 지루함도 다르게 보인다. 어쩌면 지금이 삶에서 한 번은 꼭 필요한 선물 같은 시기일지도 모른다.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최혜진)>의 이치카와 사토미 인터뷰 구절을 인용하며 마무리. 제이드심 영상과 결이 비슷하다.
제 안엔 제가 의지하고 믿는 친구가 있습니다. 깊은 곳에 있는 제 본성입니다. 중요하고 무거운 고민이 있을수록 남을 만나 의견을 구하기보다는 그 아이와 대화합니다. 프랑스에서 저는 완전히 혼자였습니다. 모든 문제를 혼자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지금도 고민이 생기면 철저하게 혼자가 됩니다. "넌 어떻게 생각해? 지금 이 결정이 마음에 들어?" 이렇게 계속 질문을 던지죠. 만약 그 친구가 "응"이라고 답하면 떨치고 일어납니다. 머뭇대지 않고 추진하죠.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제 유일한 판단의 잣대는 내면의 친구가 좋아하는 일인가 아닌가, 이것 딱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내면의 친구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조용하게 오랫동안 혼자 있을 시간을 줘야 해요.
다음 글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