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보다 배꼽에 빠져버린 어느 독자의 주접스러운 후기
*의식의 흐름 기법 주의하세요.. 서평이라기보다 그저 주접입니다
박완서 얘기부터 해야 한다. 올해 초 나는 오랫동안 서재에 박혀있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처음으로 완독 했다. 문장과 구성이 뛰어나 술술 읽히면서도 살아있는 역사가 그대로 담겨있어 어어엄청나게 감명을 받았다. 곧바로 박완서 팬이 되어 덕질을 하다가 문득 박경리 책도 읽어야겠단 결심이 섰다. 무릇 글쓰기를 진로로 삼겠다면 한국 문학의 기둥과도 같은 두 분의 대표작 정도는 반드시 읽어야 하지 않나. 박완서 책이 이렇게 재밌다면 박경리 책도 감명 깊을 거라 기대하며.. 토지 1권을 찾아 헤맸다.
내 기억에 우리 집(본가) 서재엔 아주 어렸을 때부터 토지 시리즈가 항상 꽂혀있었다. 심지어 엄마아빠가 우릴 최참판댁에 데려간 적도 있었다. 그땐 그게 뭔지도 모르고 올갱이국만 맛있게 먹었다. 아무튼 삼국지 초한지 태백산맥 옆에 분명히 자리 잡고 있었던 토지를 가져오려 했지만,, 우리가 분가한 사이 깔끔한 엄마는 책을 다 치워버렸고,, 언니랑 내가 베란다 창고를 아무리 뒤져도 토지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태백산맥을 발견해서 이거라도 읽을까 싶었는데 아빠가 태교에 안 좋다고 반대했다; ㅎ...) 어쩔 수 없이 도서관에서 빌리려는데 세상에나 토지 1권은 인기가 많아 어디든 다 대출 중에 예약까지 꽉꽉 차있는 것이다..! (재밌는 점은 딱 1권만 그렇고 2권부터는 널널하다^^..) 예약을 걸어놓고 한참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토지를 만났다.
토지 1부 1권 / 박경리 / 마로니에북스 / 1969
일단 두께에서 압도당했고 처음에 서론이 너무 길어서 넘겨버렸다. 왠지 박경리 선생님의 말씀은 마지막에 읽어야 울림이 깊을 것 같아 그냥 바로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런데..
솔직히 너무 지루하고,, 뭔 말인지 모르겠고,, 진도가 안 나갔다. 옛날 말투에 적응이 안 가는 데다 인물이 하도 많아서 이해하기 어려웠다. 병렬 독서를 하다 토지만 읽으면 유독 잠이 쏟아졌다. 내 문해력에 정말 실망했고,, 문창과나 국문과를 갈걸 그랬다면서 이제라도 서울에 살았으면 문창과 대학원을 가고 싶다던 나의 과거 발언을 후회했다. 토지도 못 읽으면서 뭘 나대 나대긴,, 호호
그래도 여자로 태어나서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라기보단 지금 포기하면 앞으로도 영영 못 읽을 걸 알기에, 아니 사실 도서관 예약 기다린 게 아까워서 억지로라도 2장(챕터)씩 읽었다. 플래너에 써놓을 정도로 숙제에 가까웠다.
그러다 중반이 넘어가자 이야기에 흠뻑 빠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나무위키 덕이 컸다. 초반에 '서희가 갑자기 왜 울지?', '윤씨부인이 누군데..?', '봉순네랑 봉순이, 임이네랑 임이, 월선네랑 월선이 왜 같은 이름이 두 개씩임..?' 할 정도로 근본도 몰랐던 나는 나무위키와 각종 블로그를 찾아가며 인물 관계를 대충 파악했다. 이 과정에서 스포도 많이 당했지만 그게 또 가관이라 더욱 흥미가 생겼다. 그다음부턴 의무감 없이도 3장, 4장씩 후루룩 읽었다.
트위터에서 토지가 웹소설의 시조새 격이라고, 맺고 끊음이 장난 아니라던데 정말이지 이야기 전개가 감질맛 난다. 웹소설을 잘 모르는 나한테는 토지가 마치 임성한/김순옥/김수현 작가 드라마 같다. 여러 인물의 이야기가 동시에 펼쳐지는데 주조연할 것 없이 다 특색 있고 다음 이야기가 기대된다.
주연은 역시 최참판댁 일가(최치수, 윤씨부인, 서희)다. 1권에서 최치수는 병약한데 쎄한 구석이 있고 / 윤씨부인은 강단 있는 마님 느낌이고 / 서희는 계속 땡깡만 부린다. 서희가 크면서 성장하고 뭔가 이뤄내고 하는 게 앞으로 주된 전개인 듯하다. 솔직히 서희 매력은 아직 모르겠고(아직까지 진짜 떼만 쓰는데 초등교사로서 ptsd옴..) 길상이가 맘에 드는데 둘이 중심인물이 될 테니 기대가 큽니다..
내가 가장 끌리는 건 아무래도 용이와 월선의 불륜 이야기다. 최애 드라마가 '내 남자의 여자'인 사람으로서 참 한결같은 취향이다.. 구구절절 둘의 서사가 웃기고 재밌고 파격적이고 애처롭다. 불륜 드라마를 볼 때마다 나는 항상 본처를 응원했는데 왜 여기선 월선이가 가여운지 모르겠다.
- 이용: 훤칠한 미남. 월선이가 첫사랑이었는데 무당 딸이라 집안 반대가 심해서 강청댁하고 결혼함. 강청댁하고 잘 살다가 월선이가 마을에 돌아오니까 흔들림.
- 강청댁: 용이 본처. 남편이 잘생긴 데다 애도 없어서 불안형 됨.. 너무 불안한 나머지 남편과 월선뿐만 아니라 동네 아줌마&꼬마들한테도 공격적임. 불쌍한데 정은 안 가는 인물 ㅜ
- 월선: 무당 딸. 엄마가 용한 무당이었음. 어느 정도냐면 동네 아줌마들끼리 월선이가 용이랑 바람피운 건 욕하면서도 월선이 엄마만 한 무당이 없었다고 인정함.. 동네에서 주막 운영 중. 용이를 애써 밀어냄.
(스포주의) 1권까지 진행된 내용: 용이랑 월선이 바람 피움. 그거 알고 강청댁이 월선이 찾아가서 머리 끄댕이 잡고 팸. 월선이 도망감. 용이 우울증 걸림. 용이가 강청댁 때림(최악의 남편).
뻔한 스토리지만,, 강청댁이 남편을 미워하면서도 약을 지어주고, 용이가 돌아가신 홀어머니를 생각하며 강청댁에게 정을 주려고 노력하고, 그럼에도 월선이가 그리워서 밤에 찾아가는 장면이 기가 맥힌다. 용이는 맨날 “우리 같이 도망갈까?” 이러고 월선이는 “안돼요. 이제 찾아오지 마세요.”하면서 같이 과거를 그리워하고 운명을 탓한다. 여기에 이 모든 걸 암암리에 다 알고 뒷얘기를 신나게 하는 마을 사람들까지 포인트!
이외에는 조준구랑 최치수 기싸움도 재밌고, 김평산이 꾸미는 계략도 궁금하다. 그렇게 즐기다 보니 1권을 다 읽었다.
그리고 드라마 버전을 찾아보는데 캐스팅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1987 버전
2004 버전
이민영 씨는 결사곡에서 아련한 불륜녀셨는데 토지에서도 구천이랑 도망가는 별당아씨로,, 근데 잘 어울림,,
나는 김혜선 씨를 소문난 칠공주 & 오케이 광자매에서 푼수 역할로만 봐서 그런지 월선이랑 매칭이 안 된다.
원작에 임이네가 동네에서 제일 예쁜 아줌마로 나오는데 박지영,, 맞아요,, 잘 어울려 (스포 하자면 임이네도 나중에 용이랑 엮인다고 한다. 1권에선 아직 아니지만. 용이 너는 대체 여자가 몇 명이냐?)
아낙네들이 모여서 조준구 뒷담화하는 게 너무 웃기고ㅋㅋㅋㅠ 최치수 옷맵시 난다고 칭찬하는 것도 골 때림
https://www.joongang.co.kr/article/3154703
두 분의 관계도 뭉클하다. 마침 두 분 다 카톨릭이고 박 씨시다(?) 한국 문학에 박경리 박완서 작가님이 계셔서 어찌나 다행인지. 이제야 알게돼서 아쉽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같은 작품을 읽어도 이만큼 감동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라도 두 분의 문학을 누릴 수 있어 기쁘다. 덕분에 한국 문학을 더 사랑하게 됐다. (조리원에서도 토지나 주구장창 읽을 예정!)
책 맨 앞에 박경리 작가님 서문은 역시나 기깔 나는데 그건 도서관 반납일을 앞두고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읽는 바람에 남기질 못했다. 2권부터는 더 알차게 기록해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