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랭이의 두 번째 출산
쑥이를 보내고 아렸던 마음이 다 낫기도 전에 달래가 아프기 시작했다. 기운 없이 축 늘어져 있더니 설사를 하는지 엉덩이가 지저분했다. 그땐 망설이지 않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다시는 쑥이처럼 보내는 일은 없길 바랐다. 막상 병원에서 범백 검사를 해 보자는 말을 듣고는 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겠지만, 평생 듣고 싶지 않은 단어들이 있을 것이다. 범백, 복막염, 신부전 등등. 특히 범백(고양이 범백혈구 감소증)은 어린 고양이들에게 치명적이고, 전염성이 높다. 달래가 걸렸다면 봄이와 노랭이도 걸렸을 확률이 높았다. 다행히 키트 반응이 아주 옅게 나왔고, 상태로 보아 초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약을 받아 집으로 데려왔는데 그대로 마당에 둘 수가 없었다. 다른 길고양이들과의 접촉도 두려웠고, 초여름이었지만, 밤에는 쌀쌀하다 느껴졌다. 또 밥과 약을 꼬박꼬박 먹이고 변을 관찰하려면 실내에 둘 수밖에 없었다. 집 안 고양이들과 마주치지 않고 격리할 수 있는 공간은 보일러실로 쓰는 다용도실 밖에 없었다. 노랭이와 봄이, 달래 모두 그곳에 대피 시키고 보살피기 시작했다.
노랭이는 갑작스럽게 사는 곳이 바뀐 게 불안했는지 내내 울었다. 봄이는 천지분간 못하고 3m 남짓 되는 다용도실을 질주했다. 좁은 공간에서 그렇게 뛰어다니니 노랭이가 혼이 빠질 만도 하지. 노랭이는 다용도실에 달린 작은 창문을 열고 탈출을 시도하다 몇 번 잡혔다. 내가 열려고 해도 힘든 문을 열고 나가고 싶을 정도로 봄이와 달래의 우다다는 심각했다. 우다다를 하다가 문에 쾅 몸을 박기도 하고, 밥그릇 물그릇, 화장실을 와장창 엎어버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소심한 집 안 고양이들은 깜짝 깜짝 놀라곤 했는데, 그래서인지 불안한 표정으로 다용도실 문 앞을 내내 왔다 갔다 했다. 늘 평온하던 일상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하는 표정으로.... 다행히 며칠 만에 달래는 평소보다 더 기운을 찾았고 몸무게도 쑥 늘었다. 노랭이와 봄이에게는 증상이 나타나지 않아서 일주일 정도 다용도실 생활을 마치고 모두 무사히 마당으로 퇴원하였다.
그해 여름은 유독 비가 자주 내렸고, 가을까지 태풍이 이어졌다. 비가 올 때마다 마당 고양이집 앞에 우산을 받쳐두곤 했는데, 비바람이 치면 우산이 날아가고 집 안까지 비가 들어갔다. 축축한 집에 들어가기 싫고 바람이 무서우니까 세 마리 모두 창턱에 올라가서 비를 피하는데, 내가 보이면 큰소리로 울어댔다. 그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약해져서 현관으로 긴급 대피를 시켰다. 박스로 임시 화장실을 만들어주고 바닥이 차가울까 봐 헌옷과 배변패드를 여기저기 깔아주었다. 다음 날 현관을 열면 태풍이 여기로 지나갔나 싶을 만큼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화장실은 엎어져 모래가 바닥에 날리고, 배변패드와 옷은 다 찢어져 있고, 화분의 흙을 파서 똥을 싸 놓기도 했다. “다시는 집 안에 들어오게 하나 봐라!”하고 분노하지만, 비가 오면 또 눈물을 머금고 박스 화장실을 만들고 있는 나....
그래도 고마운 마음이 있었는지 녀석들이 보은을 하기 시작했다. 딱히 뭘 바라고 한 일도 아닌데 말이다. 이왕 보은을 할 거라면 1등 당첨 로또를 주워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녀석들이 준비한 선물은 쥐였다. 그래 그 쥐 말이다. 회색이고 꼬리가 길고 귀여운 까만 눈을 가진 쥐.... 이미 그런 사례들을 여러 애묘인들의 증언을 통해 알고 있던 나는 놀란 표정을 짓지도 왜 그랬냐고 수선을 떨지도 않았다. 난리 치고 소리 지르면 좋아하는 줄 알고 더 잡아온다는 정보를 몰랐다면 큰일 날 뻔했다. 섭섭하지 않게 칭찬을 하거나 먹는 흉내를 내 주라는 애묘인의 글을 읽은 적도 있으나 나는 아직 그 정도로 고양이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므로 아주 차분하게 남편 보여 줄 사진을 찍은 후 모른 척을 했다. 남편에게 좀 치워달라고 했더니 “고양이는 니 소관”이라며 냉정히 거부당했다. 어쩔 수 없이 고양이 모두 마실을 나갔을 때를 노려 안경을 벗고(흐리게 보고 싶었다) 고무장갑을 끼고 빗자루와 삽을 이용해 조용히 사체를 처리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다음엔 새를 잡아왔다. 그래 그 새 말이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내 아침을 깨우고 나무 열매를 콕콕 집어 먹으며 우아한 초록 깃털을 자랑하는 귀여운 새.... 그것도 아기 새.... 잔인한 맹수들이 아기 새를 잡아 온 날에, 남편은 그 새를 꼭 닮은 어른 새들이 뒷마당에서 구슬프게 울더라는 증언을 남겼다. 그날은 이성을 잃고 “이노무 고양이 새끼들!”하고 빗자루를 들고 혼냈지만, 다음에 또 쥐를 잡아온 걸로 보아, “이 인간이 새는 별로고 쥐가 마음에 든 모양.”이라고 해석을 한 듯싶다. 그 뒤로 참새 한 마리, 쥐 한 마리가 더 희생을 당한 후 다행히 더는 선물을 갖고 오지 않았다.
사실 당시 쥐의 희생보다 더 큰 위기는 노랭이의 심상찮은 배였다. 출산 후 반쪽이 됐던 노랭이의 배가 어느 날부터인가 조금씩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수유 기간이 끝나면 TNR을 해 줄 예정이었는데 출산 후 두 달 쯤 되니 배가 커진 듯해 보였다. 남편은 임신을 의심했지만, 나는 젖을 먹이고 있는데 무슨 임신이냐고 나도 임신 안 해 봤지만, 역시 남자라 임신을 모른다며 무시했다.
역시 남편 말 안 듣는 못된 버릇을 고쳤어야 했다고 후회해봤다 소용없다. 고친다 한들 노랭이의 두 번째 임신을 막을 수는 없었겠지만 말이다. 수의사 선생님께 수유 중에도 임신이 가능하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듣게 되었다. 어째서 그런 비합리적인 일이 고양이에게 벌어질 수 있단 말이냐! 결국 출산한지 석 달 만에 노랭이는 두 번째 출산을 하게 된다. 4월 20일에 첫 출산을 하고 7월 26일에 두 번째 출산을 했다는 것은 고양이의 임신 기간으로 보았을 때 첫 출산 후 한 달 만에 임신을 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왕머리 놈! 이 짐승 같은 놈! (아참 짐승 맞지)
내가 왕머리(노랭이 남친 중 머리가 아주 큰 치즈 고양이)를 지목한 것은 다름 아니라 노랭이가 또 치즈만 8마리를 낳았기 때문이다. 당시 동네에 돌아다니는 치즈 고양이는 왕머리 밖에 없었으므로 또 왕머리가 아빠인 게 분명했다. 이는 내가 목격을 한 바인데, 출산한 날 아침 새끼 8마리를 놔두고 노랭이가 사라졌다. 첫 출산 때는 새끼들 곁을 떠나지 않고 경계를 했기 때문에 이상한 일이었다. 노랭이를 찾다 골목 바깥쪽에서 울음소리가 나서 가 보니, 노랭이가 왕머리를 때리고 있었다. 봄이도 옆에서 아빠가 맞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내 생각엔 노랭이가 왕머리에게 “이제 새끼는 니가 키워라!”하고 멱살을 잡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수유 중이라 안심하고 왕머리의 출입을 허용했던 나의 불찰이었다. 왕머리를 쫓았어야 하는데 그래도 아빠라고 봄이와 달래가 어찌나 좋아하는지 밥이나 먹고 애들이랑 놀다 가라고 놔뒀던 것이 한이다. 노랭이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저 조그만 몸으로 출산한지 얼마 됐다고 8마리 새끼를 배 안에서 또 키웠으니.... 태어난 새끼들도 아주 작았다. 과연 다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약해 보였다. 장마에 태풍에 견딜 수 있을까. 예상대로 매일 한 마리씩 사라지고 결국 5마리가 남았다. 첫 출산 때처럼 약해지거나 죽은 아기를 노랭이가 멀리 물어낸 것 같았다. 남은 5마리는 어떻게든 살려서 입양을 보내야겠다 생각했다. 노랭이와 봄이, 달래는 내가 마당에서 계속 돌볼 거라고 마음먹었지만, 8마리는 무리다. 내가 힘든 것도 있지만, 결코 마당에서 모두 행복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쑥이를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아무리 잘 돌봐주어도 길에서의 삶은 녹록치 않다. 어른 고양이에게도 힘든 삶인데, 연약한 새끼들이 잘 살아낼 리가 없었다. 너무 예쁘지만, 그래서 볼 때마다 눈물이 났다. 너희를 다 어쩌면 좋을까.
*마당에서 봄이와 달래, 노랭이까지는 돌보겠다 마음먹으면서 봄이, 달래는 개명을 했다. 남편이 둘이 너무 닮아서 헷갈리니까 신체적 특징을 따서 봄이는 한발이, 달래는 양발이로 부르자고 했다. 봄이는 앞발 중 한쪽만 흰 양말을 신었고, 달래는 앞발 둘 다 흰 양말을 신었기 때문이다. 나도 그쪽이 훨씬 정이 가는 이름이라 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