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별로 보낸 막내 랏샤-2
아무래도 책방은 학생들이 드나드는 곳이니 랏샤를 2층 집으로 데려갈까도 고민했지만, 랏샤에게는 이 공간이 가장 편할 것이라 생각해서 그러지 않았다. 랏샤가 사랑하는 것은 모두 이 공간에 있으니까. 제일 좋아하는 살룻 형아도 여기 있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내내 바라보던 마당도, 마당 고양이들도 여기 있으니까. 랏샤를 사랑하는 수많은 팬들을 만난 것도 이곳이니까. 랏샤에게는 좋은 추억만 있는 책방에 있는 편이 나와 남편이 일하는 동안 혼자 2층에 있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한 달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해서 나는 계속 어지럼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도 꾸역꾸역 운동을 갔다. 랏샤가 아프기 전에 큰돈을 주고 개인 PT를 끊었던 게 그나마 나를 지탱해주고 있었다. 돈이 아까워서 간 게 아니다. 사정을 말하고 미루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랏샤가 상태가 많이 나쁠 때는 가지 못했지만 되도록 가려고 노력했다. 내 상태가 별로 좋지 않으니 트레이너가 그냥 집으로 돌아가서 쉬라고 말한 적도 있었지만, 어쨌든 운동을 하고 싶었다. 운동으로 몸을 힘들게 하는 동안은 랏샤 생각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땀을 흘리고 횟수를 셀 때 언제 이 시간이 끝날까 하면서 내 몸이 괴로운 것만 생각났지 랏샤가 아픈 건 까맣게 지워졌다.
‘아, 나는 역시 내가 중요한 사람이구나. 나는 랏샤가 떠나도 잘 살겠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기적인 이 마음이 가장 위로가 됐다. ‘나는 아직 나를 돌보려고 하는 구나, 나는 역시 고양이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하면서 랏샤가 떠난 이후를 준비했다. 나는 나를 사랑해서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했으니, 나를 위해서 너무 심하게는 무너지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랏샤와 함께 찍은 사진이 없었다. 랏샤가 너무 귀여워서 랏샤 사진은 수천 장인데 나와 같이 찍은 게 없었다. 나는 셀카봉을 가져다가 아픈 애를 안고 웃으면서 셀카를 몇 장 찍고는 또 그게 서러워서 많이 울었다. 왜 한참 예쁠 때 같이 찍지 못했을까.
랏샤는 병원에서 한 번, 집에서 두 번 고비가 왔고 마지막 네 번째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떠났다. 랏샤가 괴로워 할 때마다 제발 가지 말라고 울부짖다가, 또 이제 편하게 가라고 되뇌기를 반복했다. 내내 누워 지내면서도 꼭 화장실 모래에다 볼 일을 보려고 애썼던 아이가 떠나기 며칠 전부터는 그러지 못했다. 누워서 앙앙 울어대면 내가 안아서 모래 위에 세워주었다. 다리에 힘이 없어 서 있지를 못해서 볼 일을 보는 동안 잡고 있어야 했다. 그렇게 되는 순간까지도 랏샤는 나를 보면 반응하고 이름을 부르면 “아앙”하고 대답해주었다. 그러다 떠나기 이틀 전부터는 밥도 약도 물도 거부했고 더는 반응을 하지 못했다. 주사기로 부어주면 삼키지 못하고 다 흘러나왔다. 이별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착한 랏샤는 금요일 수업이 다 끝날 때까지 엄마를 기다렸다가 함께 누워 잠시 자고 나서 2020년 6월 26일 밤 11시에 고양이별로 떠났다. 나는 딱딱하게 굳은 랏샤의 몸을 깨끗이 닦이고 눈을 감겼다. 아침이 올 때까지 랏샤를 쓰다듬으며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했는지, 우리에게 어떤 좋았던 기억이 있는지 이야기했다. 그런데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 나왔다. 사실 별로 잘해준 게 없었다. 막상 장례를 치르려고 보니까 랏샤 물건이랄 만한 게 없었다. 나는 랏샤가 무엇을 좋아했는지도 몰랐고, 뭘 잘 먹는지도 몰랐다. 장난감이래야 낚시대 흔들어준 게 다고, 아픈 아이들 때문에 처방사료만 먹었고, 간식은 몸에 나쁘다고 아예 먹이지 않았다. 병을 얻고 나서야 밥을 잘 먹지 않아서 이것저것 간식을 사다 사료에 섞어 먹였다. 나는 정말 랏샤에게 면목이 없었다.
꼬박 밤을 새고 아침 7시가 넘어 장례식장에 연락해 오후 5시 예약을 했다. 내 옷에 랏샤를 싸서 두고 나는 2층에 올라가 남편에게 말하고 샤워한 후 잠시 잤다. 일어나 밥을 먹고 남편과 장례식장으로 갔다. 가는 동안 랏샤의 털을 쓰다듬었다. 죽었다고 믿기 힘들 만큼 부드러운 털. 랏샤는 유난히 털이 굵고 건강했다. 태어나서 딱 1번 목욕을 시켰는데도 언제나 윤기가 나고 부드러웠다. 몸은 빳빳하고 뼈 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 부드러운 감촉만은 여전했다.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울지 않으려 했는데, 마음의 준비가 끝났다 생각했는데, 말갛게 닦여서 수의와 꽃에 둘러싸여 나온 랏샤를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랏샤 얼굴을 쓰다듬으며 오열하는 나를 남편이 옆에서 토닥이며 같이 울어 주었다. 한참을 울다 이제 보내주자는 남편의 말에 마지막 인사를 하고 화장을 했다. 2kg가 겨우 넘는 아이를 태우는 데도 꽤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영원히 다섯 살인 내 아가 랏샤가 재가 되어 돌아왔다.
약간의 털과 유골함을 아직 가지고 있다. 여름 지나면 마당에 묻어줘야지, 추석 지나면 묻어줘야지 했는데 새해가 밝았는데도 그러지 못하고 있다. 겨울이라 땅이 단단해서 묻어 줄 수 없다고 변명하고 있다. 봄이 오면, 그래서 땅이 다 녹으면 그땐 어떤 변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랏샤의 사진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 랏샤 영상을 보고 싶은데 그러고 나면 그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자신이 없다.
이 글을 쓰면서도 많이 울었다. 랏샤의 죽음 이전 글까지 써 놓고 한참을 못 쓰고 있었다. 랏샤 얘기를 쓸 자신이 없어 망설이고 망설였다. 그래도 써야 했다. 랏샤가 떠난 이후 나는 고양이 이야기를 쓰겠다고 다짐했다. 롤랑 바르트는 “글쓰기는 사랑하는 대상을 불멸화시키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내가 살아온 것의 반도 못 살고 떠난 고양이들, 또 떠날 고양이들을 내 안에 불멸화시키기 위해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쓰지 않으니 계속 잊어갔다. 우리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그게 어떤 의미인지 희미해지는 것만 같았다.
빨리 쓰자고 재촉해보지만 노트북을 여는 게 쉽지 않았다. 랏샤가 떠난 후에 내 마음에 금이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금을 겨우 이어 붙이려고 하면 또 더 큰 충격이 왔다. 연이어 고양이들이 아프고 떠나가면서 금은 시커먼 구멍이 되어갔다. 뒤늦게 이것이 펫로스 증후군이란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