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은 나를 지켜주지 않았다

사수였던 그 남자, 그리고 회식의 기억

by 화유

살면서 경험한 다양한 직업 중 나의 두 번째 직업이자 두 번째 회사에서의 이야기이다.


회사의 구조는 심플했다.

나는 디자인팀 따로 없는 일반 회사의 디자이너로 입사했다. 웹팀의 팀장님이자 과장님인 미혼의 남성분이 사수였다.

정식으로 디자인과를 나오지 않았던 터라 학원에서 몇 달 배운 디자인 실력으로 정식적인 디자인 회사에 입사하기란 쉽지 않았기에 조금은 허들이 낮은 일반 회사로 입사 지원을 하게 된 것이다.


이력서 합격 후 대면 면접.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회사로 향했다.

처음 마주한 회사의 풍경은 평범한 분위기였고, 열댓 명의 직원들이 보였다. 대여섯 살쯤 많아 보이는 여자분의 안내를 받아 회의실에 들어갔다.


잠시 후 들어온 면접관은 한 명. 어리숙한 외모와 더듬거리는 말투를 보며ㅡ그 당시의 나를 돌이켜 보면 상당히 건방졌던 거 같다ㅡ상대를 얕봤다. 디자인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것 같아 유식해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당한 태도와 디자인 학원에서 배운 용어들을 늘어놓으며 신입이지만 신입 같지 않아 보이게 면접에 임했다.

면접은 합격했고, 그분이 내 사수가 되었다.


내 자리는 사수와 등을 맞댄 구조로 뒤돌면 상대의 자리가 보이는 위치였다. 첫날부터 회식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그분 특유의 제스처인 손으로 입 가리고 '힉힉' 웃기를 반복했다. 둘 뿐인 팀이었지만 잘 챙겨 주는 사수를 만난 것 같다는 생각에 좋다고 따라나섰다. 회사에 대한 이야기와 어떤 업무를 해나갈지 팀에서 자연히 오갈 수 있는 주제로 대화를 나누며 마무리되었다.


회사 업무를 배우고, 주어진 업무들을 처리해 가는 일상이 이어졌다. 한동안 별다른 불편함 없이 지냈다. 티 나지 않게 작은 것들을 알려주기도 했고, 업무 분장도 잘 나눠주는 편이었다. 다만, 때때로 던지는 농담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예쁜 사람이 디자인도 예쁘게 하네. 힉힉"

"아니, 다. 다 나이도 많고, 재미없었는데 xx 씨 오고 분위기가 좋아졌어."

"향수는 뭐써? 향기가 너무 좋아"


칭찬인지 뭔지 모를 말을 자주 건넸다. 당시엔 '그냥 성격이 저런가 보다', '외롭나' 하고 넘겼지만, 점점 그런 말들의 횟수가 늘어갔다.


첫 회식이 있고 며칠 후 퇴근 시간 무렵,

"저녁 먹고 갈래요?"라는 사수의 말에 약속도 없었고, 배도 고팠기에 자연스럽게 수락했다.

회사 앞 꽤 가격이 나갔던 걸로 기억하는 이자카야로 향했다. 어둑한 분위기에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술은 얼마나 하냐며 이런데 와봤냐고, 사케는 먹어 봤는지, 사케는 따뜻한 게 진짜라며 술에 대한 얘기가 주를 이뤘다. 상사의 추천이었기에, 거부하지 않고 따뜻한 사케를 두 잔 주문했다. 한 모금 마시자, 목구멍을 타고 뜨거운 불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두 모금 마셨을까, 취기가 올라 더 이상 먹기는 무리였다.


"왜 그만 먹어. 더 먹어봐~ 이렇게 먹는 거야 원래."

"아니에요. 더 먹으면 취할 거 같아서 그만 마셔야 할 거 같아요."

"에이 더 먹지~ 취해도 이쁜데"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 수 없었다. 친구와 약속이 있다는 핑계를 대며 자리를 빠르게 마무리하고, 죄송하다며 전철역으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날 이후 그는 종종 저녁을 먹자고 했다. 몇 번 거절하자 '회식'이라는 명목으로 피할 수 없는 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밥 한 끼였던 자리가, 어느새 술이 당연하게 곁들여지는 자리가 되었다.

"저녁 혼자 먹기 싫은데, 너무 한 거 아니에요?"

거절할수록 죄책감을 자극하는 말들이 이어졌다. 점점 불편해졌다.


그는 대표의 남동생이었다. 사수로서의 위치를 넘어, 은연중 그 배경을 드러내곤 했다. 저녁 제안을 거절할수록 내게 주어지는 업무 강도는 높아졌고, 결국 대표에게 불려 가는 일도 생겼다. 처음엔 내가 일을 못해서 그런 줄만 알았다.

그러다 새로운 팀원이 들어왔다. 사수보다 젊고, 똑똑한 미혼의 남자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건 단순한 업무 분장이 아니라... 솔직히 갈구는 거 같아요." 그제야 퍼즐이 맞춰졌다.


어느 날, 사수와 다른 팀 남성 직원, 나 이렇게 셋이 늦게까지 회사에 남아 있었다.

그 자리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xx 씨는 섹시한 편이지. 섹시하게 생겼어. 안 그래?"

"맞아요. 섹시하죠. 힉힉."


".. 아.. 감사합니다. 하하;"


그 말들을 듣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색한 웃음으로 넘긴 뒤, 먼저 퇴근하겠다며 자리를 피했다.


얼마 후 회사를 상대로 불만을 품은 고객이 나타났다. 회사 디자인이 올라간 내 블로그까지 찾아와 악성 댓글을 달았다. 그 사실을 사수에게 알리자 "고소 자료로 쓰자"며 댓글을 전부 프린트해 달라고 했다.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 생각해 그대로 출력해 넘겼다. 그게,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될 줄은 몰랐다.


회사가 어려워지자 직원들은 하나둘 해고됐고, 그들의 업무는 고스란히 내 몫이 됐다. 네 사람 분량의 업무를 도맡았고, 너무 힘들어 사수에게 털어놓았지만 돌아오는 건 늘 "어쩔 수 없다"는 말뿐이었다.

결국 대표를 찾아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더는 회사를 다닐 수 없다고 말했다.

자신의 남동생이 해온 행동들을 별일 아닌 것처럼 넘기며 조용히 사표를 수리했다.


그리고 몇 달 뒤.

블로그에 가고 싶은 펜션이 생겨 글과 사진을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잊고 있던 사수에게 연락이 왔다.


"그 펜션 나랑 갈래요? 둘이 가기 그러면 친구 한 명씩 해서 넷이 가도 되고"


소름이 끼쳤다. 블로그를 알려준 적도 없는데, 어떻게 찾아낸 걸까. 기억을 더듬다 문득, 예전 그 프린트물에 내 블로그 링크가 남아 있었던 게 떠올랐다.

그대로 번호를 차단했고, 블로그 글도 내렸다. 다행히 그 이후 연락은 없었다.


그때는 말하지 못했다.

침묵은 나를 지켜주지 않았다.

상처는 오래도록 남았고, 이제야 말할 수 있다.

같은 일이 누구에게도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사진 : Pexels_Anete Lus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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