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출 시절의 일이다. 여자 후배 A가 나를 찾아왔다. 자신이 지금 조연출로 일하고 있는 드라마의 연출자 B가 스크립터를 추행하고 있는데 도움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B는 한참 고참 피디였는데, 촬영을 할 때 항상 스크립터의 손을 쓰다듬으며 모니터를 본다고 했다. A가 스크립터를 따로 만나 괜찮은지 물어보니 너무 힘들다며 울었다고 했다. A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전면에 나서서 공론화를 시키는 건 부담스러워했다. 나를 찾아온 것도 그래서였다.
이 얘길 처음 들었을 때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분노, 당혹스러움, 미안함, 부끄러움... 그러나 이제와 솔직히 고백하건데, 가장 컸던 감정은 '당혹스러움'이었다. 나한테 왜 이런 얘길 하지. 난 아무 힘도 없는데. 총대 매고 공론화시켰다간 나만 찍힐 거 같은데... 따위의 낯뜨거운 감정들. 아마 A도 자기 혼자 이걸 해결하기 두려우니까 날 찾아왔을텐데. 그래도 자기 딴엔 뭐라도 해봐야겠다 싶어서 용기를 낸 걸텐데. 이런 얘길 듣고 모른 척 하면 쪽팔리잖아. 뭘 해야하지? 그때 참 많은 생각을 했었다. 10년도 더 지난 과거의 일이다.
'몰락의 시간'의 저자 문상철씨는 그런 순간에 용기있는 선택을 한 분이다. 안희정을 가까이에서 수행비서로 모셨고 안희정계로 분류되어 정치활동을 하던 사람이 피해자의 상황을 알고는 기꺼이 피해자 편에 섰다. 거대한 팬덤의 여론전, 안희정을 지켜야 살아남을 수 있는 수하 정치인들의 모략, 피해자스러움을 지적하는 보수적인 사회 시선... 그런 거대한 압박 밑에서도 문상철씨는 소신을 지켰다. 가족이 위협받고 생계가 끊어질 상황에서도 말이다. '몰락의 시간'은 그랬던 그가 사건이 끝난지 5년 만에 세상에 내놓는 일종의 회고록이다.
책은 담담한 어조로 안희정과의 첫 만남, 그의 신뢰를 얻고 측근이 된 과정, 자신이 맡았던 업무, 안희정이라는 정치인이 성장하고 정체되고 변질되고 끝내 몰락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과 권력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한편의 희극이다. 또 한국 정치가 2025년에도 이 수준인 이유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비극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책은 재미가 있다. 한 인간이 권력에 취해 상승하고 추락하는 과정이 모두 담겨있기 때문이다. 마침 '밀리의 서재'에도 있으니 이용하시는 분들께 일독을 권하고 싶다.
과거 성추행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궁금하실 것 같다. 그 사건은 조연출 회의를 통해 공론화가 되었고, 담당CP가 사건 해결을 약속했다. 하지만 사건이 공론화 된 후 정작 피해자인 스크립터가 조사에 부담을 느꼈다. 자신은 괜찮다고, 그냥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사건은 그냥 마무리되었다. 아무 것도 변한 것 없이.
다행인 건 그게 끝이 아니었다는 거다. 문제를 일으킨 B선배는 그 다음 프로그램에서도 같은 사건을 일으켜 연출 자리에서 퇴출되었다. 불행인 건 그가 몇 년 뒤에 다시 돌아왔다는 점이고.
세상은 참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더욱, 힘든 상황에서 용기를 내는 개인들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상철씨도 그렇고, 박정훈 대령도 그렇다. 이런 분들이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할 때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오길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