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am I?
언제였더라. 친구 녀석이 갑자기 자기가 죽어서 납골당에 안치되면 비틀즈 멤버가 사용한 악기를 미니어처로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했다. 이 녀석 또 뚱딴지같은 소리를 던져서 사람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구나 그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져서 부탁받은 모델을 메모장에 기록해놨다.
Gibson ES355 체리
리켄베커 존 레넌 모델
호프너 폴 매카트니 베이스
혹시나 까먹을까 기록한 까닭도 있지만 내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어떤 물건을 넣어 날 추억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날 어떤 사람으로 추억하며 무슨 물건을 보며 떠올릴까?
되돌아보면 난 어딘가에 미친 듯이 몰두한 적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끝을 못보는 편이었다. 7살의 나이에 피파 2002를 할 때조차 한국팀으로 월드컵 모드를 하는데 4강에서 번번이 독일의 벽 앞에서 무너지자 포기했다. 아 미국이 독일을 꺾고 4강에 올라갈 땐 우승컵을 들 수 있었다. 브라질보다 독일이 어렵더라. 꼭 1-0으로 패배해서 7살의 어린 나를 분노케 한 올리버 칸 선수... 어쨌든 요즘 개인방송 플랫폼에서 다양한 게임을 플레이하는 스트리머들을 보면 꾸준하지 못한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애초에 날 축구게임을 좋아하던 아이로 추억할만한 사람은 피파 축구게임 CD를 사주시던 아버지밖에 없으니 패스...
책이라고 말하려니 내가 과연 책 읽기를 좋아하던가? 물음표가 꼬리를 물었다. 초등학생이 꼭 읽어야 할 문학 100선, 책을 읽읍시다 선정도서,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뽑은 우수문학 100선... 책을 뽑아주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100을 좋아하던가. 위 목록에 적힌 책을 읽으려 노력했고 실제로 읽은 책도 제법 된다. 벌레가 되어버린 인간의 이야기를 써내 변신 모티프를 하나의 장르로 창조해 낸 카프카가 좋다. 유산 때문에 아버지를 죽인 세 형제의 갈등을 대화로 풀어낸 도스토예프스키의 파격적인 상상력이 부럽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가 왜 이렇게 말했는지 지금도 잘 모른다. 독서는 작가와의 대화라 말했던 헤르만 헤세와 대화라니 어림도 없다. 20살이 넘은 지금도 헤세의 생각을 여전히 모르고 독서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내 마음속 싱클레어는 언제쯤 헤세가 되려는지.
가만 보면 무식하다는 소리가 치욕이자 수치라 생각한 어린날의 내가 '지기 싫어서' 만들어낸 또 하나의 자아 같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나', 경쟁심이 별로 없는 내가 유일하다시피 꾸려낸 자존심의 자아 같은 거지. 지금은 이 녀석이 죽었는지 인사이드 아웃의 빙봉처럼 제 임무를 마치고 기억 공간 어딘가에서 사라졌는지 자존심 때문에 책을 읽는 일은 없다. 요즘에는 인문교양서적에 빠져 유수의 철학자가 생전 남긴 말을 곱씹어본다. 그러다 보니 날 똑똑한 척하는 사람, 가르치길 좋아하는 사람 같은 수식어로 날 포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이가 없다. 과거와 달리 나의 성숙을 위해 틈틈이 책을 읽는 뿐이지 남을 가르치려 들기 위해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게 아니다. 나는 애초에 남을 가르칠 역량이 안될뿐더러 들어먹지 않으려는 상대를 억지로 계몽시키고 싶지 않다. 부모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자식임에도 교사, 지도사를 선망하지 않은 이유다. 아 안 물어봤다고?
"듣기 싫으면 제 갈길 가세요."
각설하고 처음 게임에 미쳤던 어린 날을 얘기하니 생각난 게 있다. 어릴 적부터 사람의 얼굴을 보고 얘기하는 게 힘들었다. 그 사람이 내게 어떤 표정을 짓는지 왠지 보여서 상대방의 찌푸린 얼굴을 보는 게 고역이었다. 기대감에 찬 얼굴을 보는 것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그 기대 섞인 표정이 실망으로 바뀌면 슬프다 못해 절망에 빠지고 만다. 내가 뭐라고 저 사람은 날 기대했을까.
처음엔 어린 날의 착각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남들에 비해 상대의 표정을 보고 분위기를 파악하는 게 빠르다. 이 사람이 누구에게 적대적인지 누가 이 사람을 좋아하는지 얼핏 보인다. 그래서 괴로웠다. 군상의 진면을 누군가에게 공유하면 이해받기 힘들었다. 내가 보기엔 아닌 거 같은데? 한마디로 내 생각은 무마당하니깐 말이다. 착각이라 할 수 있는 감상을 숨기려 일부러 상대의 얼굴을 보지 않은 적이 많다. 그 때문에 사람의 눈을 피한다는 소리를 어릴 적 참 많이 들었다. 지금은 눈을 피하는 일이 더 드물 정도로 상대와 눈을 마주친 채 대화하는 걸 좋아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결핍 상태인 건 이해다.
내가 상대를 이해하는 만큼 이해받아 본적이 손에 꼽는다. 경청하려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대부분 그만큼의 노력을 받지 못했다. 초등학교에 처음 들어갈 무렵 난 그저 학급문고 칸에 꽂혀있는 책이 운동장에서 굴러다니는 공차는 것만큼이나 재밌었을 뿐이다. 그런 날 바라보는 시선은 남자답지 못하다는 한 문장으로 정리되기 바빴다. 감성적인 여성형 두뇌를 가진 문학소년, 지금도 듣는 말이다. 지나치게 감성적이고 생각이 많다. 생각 좀 버려라. 귀가 아프게 듣는다. 요즘 성황리에 방영되는 모 영화가 억압받는 여성을 일깨워준 영화라고도 불리는데 되묻고 싶어 진다. 당신들은 영화 속 김지영의 남편이 공감받으면서 살아온 거 같냐고. 공감은 상호 방향적이지 힘든 사람 한 명 비춰놓고 저 사람 가엽지 않나요? 감성 팔면서 받기만 하는 게 아니다. 김지영에 공감한 사람들 중 꽤 많은 사람이 동시대에 태어난 김지훈의 애환에는 공감하지 않는다.
그래서 공감받고 싶어 공감하는 내 끊임없는 노력은 보기 좋게 실패하고 있다. 그렇다고 내 유골함 옆에 실패한 사람이라 써붙이지 않길 바란다. 죽을 때까지 실패했다는 말은 자체로 슬프기 때문이다. 나는 누굴까에서 시작한 물음이 나는 여전히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이다로 귀착되는 미약한 연결성에 난 또다시 슬퍼진다. 더 이상 슬퍼지기 전에 다른 얘기로 화제를 돌리자.
사람 눈 마주하는 게 싫어서 어린 나이에 시작한 게임, 지기 싫어서 읽게 된 책, 공감받고 싶어서 하게 된 공감... 나를 간단히 정리하자니 능력도 안되면서 일은 여기저기 벌려놓은 사람처럼 보인다. 방 정리도 나중에 한꺼번에 하는 성격이니 죽어서도 제때 공간을 치울 일은 없겠지. 언젠가 치워야겠다 생각이 들면 정리할 테니 어지럽혀도 좋다. 그러니 날 그저 이것저것 많이 아는 사람, 말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 정도로 생각했으면 좋겠다. 백과사전이라든가 나무 위키 마크 같은걸 미니어처로 갖다 놓으면 기뻐하겠다. 천당 일지 지옥일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곳에서 기쁜 마음으로 웃겠다.
아참.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모르는 법이지만 스윙스의 명언처럼 당장 오늘 죽을 수도 있으니까 확실히 짚고 넘어가고 싶은 바가 있다. 나에 대한 평중 몇몇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갈리는 부분은 공격성이다. 누군가에겐 화내는 걸 본 적이 없는 사람인 반면 다른 누구에게는 다혈질로 불린다. 내가 본 나는 화를 정말 잘 참는다. 정말이다. 소리 지르거나 따져서 변하지 않는 일에 화내지 않는다. 천성이 그렇다. 그러니 유골함 옆에 다혈질이나 인사이드 아웃의 버럭이를 갖다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저 화산같이 끓는 아이는 내가 아니다. 오히려 슬픔이와 머리색이 같은 기쁨이에 가깝다.
살아선 실패할지라도 죽어선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이해받고 싶다. 내가 당신을 이해하는 만큼.
죽는 그 순간부터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