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 위의 젖소가 웃고 있는 건 아니잖아요

식탁 위에 오르는 고기에 올리는 감사 인사

by 휘휘

며칠 전이었던가. 고기 무한리필 음식점에서 한 채식주의자 모임 회원이 피켓을 들어 올린 사건이 있었다.


“육식은 폭력이다”


우리 인간이 먹고 있는 고기가 소, 돼지 그리고 개까지 육식으로 소비될 수 있는 모든 동물에의 폭력이 될 수 있다는 문구였다. 1인 시위를 강행한 회원은 비건, 육식을 일체 거부하는 극단적 채식주의자였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일반 잡식가가 저지르는 폭력에 대해 반성과 채식으로의 전환을 요구했다. 도축장에서 희생당해 우리 식탁 위에 오르는 고기가 과연 인간이 동물에 저지른 폭력의 결과물인 걸까.


비건의 말이 무색할 만큼 육류 소비 시장은 전 세계에 걸쳐 활성화되어있다. 돼지고기를 금하는 이슬람 국가조차 닭고기로 다양한 요리를 만들어 먹는다. 종교적 신념 때문에 특정한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도 다른 방식을 통해 어떻게든 육류를 섭취한다.


세계적으로 사육되는 닭 220억 마리, 돼지 10억 마리는 우리 인간이 얼마나 육류 섭취를 사랑하는 동물인지, 포식자의 위치에 서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공장처럼 운영되는 대규모 축사는 극단적 채식주의자의 등장을 예고했다. A4 용지보다 조금 작은 공간에 욱여넣은 계사, 파리가 날리는 오물이 뒤섞인 곳에서 뒹구는 돼지우리가 그들을 만들었다.


비건이 주목했던 불결한 사육 환경, 질을 고려하지 않은 양 위주의 사육방식은 우리가 자가 면역력이 부족하여 항생제를 잔뜩 먹은 동물을 섭취한다는 공포를 야기했다. 인권에 혈안이 된 나머지 포식자로서의 권위만 챙겼을 뿐 피식자의 자리에 서 있는 사육동물의 권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던 결과다. 우리는 식탁 위에 오를 고기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 감사가 필요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최근 들어 존중을 향한 노력은 지속적으로 진행됐다. 당장 동네 마트를 가더라도 동물에 가한 폭력을 반성이라도 한 듯 ‘행복’이란 문구를 차용하여 내놓는 상품이 부쩍 늘었다. 목초를 먹고 자라 행복한 계란, 목장에서 길러 행복한 돼지... 어딜 가든 동물의 행복, 복지에 신경 쓰는 추세다. 그만큼 동물이 스트레스받지 않도록 신경 썼으며 좁은 우리가 아닌 넓은 공간에서 뛰놀도록 만들어 면역력을 자율적으로 길렀음을 강조한다.


소비자가 말하는 좋은 고기란 부드러운 육질, 몸에 해롭지 않은 자연 성분을 먹고 자랐는가의 여부 등이 있다. 소비자는 질 좋은 고기를 소비하고 고기가 될 동물은 스트레스받지 않는 환경에서 삶을 누린다는 게 ‘행복한 고기’의 논지다. 동물이 섭취당할 고기로만 보는 것이 아닌 인간이 말하는 인격적 대우를 동물에게도 행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긍정적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비건이 열렬히 주장했던 동물의 권리 보장은 이 부분에서 잡식가들과 충돌한다. 동물을 잡아먹는 행위 자체가 폭력이라는 주장을 하는 비건들이 늘어나면서 ‘고기’ 자체가 부정, ‘행복한 고기’는 사막 위의 신기루쯤으로 치부당한 것이다. 동물을 고기로 보지 말아 달라는 그들의 요구는 좀 더 청결한 환경에서의 스트레스 없는 사육을 지향하던 잡식가들에게 반기를 든 셈이다.


육식과 채식 중간쯤을 걷고 있는 사람으로서 비건의 계속된 주장에 근본적인 의문이 생겼다. 해방된 고기, 아니 동물은 행복할까 하는 물음이었다. 혹자는 동물 감금과 학대의 장이라 부르는 동물원에서 살고 있는 동물만 봐도 그러했다. 동물원의 기린은 앉은 채 기다란 목을 둥글게 말고 잔다. 초원 위에서 뛰노는 기린이 사주경계를 위해 서서 자는 것과 대조적이다. 앉아서 편히 잠을 자면 맹수가 급습할 때 재빨리 대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수면시간에 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사육되는 기린은 5시간 가까이 잠을 자는 편이지만 초원에 사는 개체는 2시간 남짓, 짧으면 10분 내외의 쪽잠을 청한다. 죽음이 주는 공포, 원초적인 두려움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쳐야 하는 초원 위의 동물이 사육되는 동물보다 행복한 걸까?


초원 위에서 기린을 산 채로 뜯어먹는 사자보다 최대한 고통을 주지 않는 선에서 도축하는 인간이 잔인하다는 비건, 그들의 말이 좀처럼 이해가지 않았다. 더불어 최근 자신을 비건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소시지빵을 먹었다, 아침에 마라탕을 먹었다는 등의 트윗을 남겼음이 밝혀져 그들의 진정성 자체에 의구심이 들었다.


식물도 자신이 뜯어 먹히는 순간에 죽음을 예감한다는 연구결과가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다. 비건이 주장해야 하는 건 더 이상 육류의 원천 배제가 아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동물의 인도적인 죽음의 지향과 잡식가들을 폭력범으로 치부하는 편협적인 시선에의 개선이다.



“우리는 문명인이기 때문에 잡식을 해야 한다. 단, 동물이 고통받지 않는 선에서 그리고 동물에 최소한의 존중을 건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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