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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휘찬 May 05. 2021

///의자.달달한.노란색

낯설게 여행하기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새로운 곳에 가고 싶을 때가 있다. 낯선 풍경, 낯선 거리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낯선 분위기까지. 아무도 나에게 신경 쓰지 않지만 익숙하지 않은 낯선 느낌 속에서 스스로 이방인이 되어 돌아다니고 싶을 때가 있다. 물론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에서도 가능은 하겠지. 대중교통을 타고 무작정 떠나기. 어딘지 모를 곳에서 내려서 돌아다니기.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언젠가 한 번쯤 해보고 싶다. 하지만 버스는 도시의 익숙한 중심지로 이동하기 마련이고 지하철을 타고 지나쳤던 곳은 눈으로 본 적은 없어도 어딘지 익숙한 느낌이 들어 덜 낯설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랫동안 정착했던 이 도시는 높은 임대료 때문에 조금씩 옆으로 이동하는 핫플레이스를 따라 근처에 한 번쯤은 발이 닿지 않았나 싶다. 이번에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 어딜지였다. 길을 찾기 위해 한껏 확대된 지도를 도시명만 보일 정도로 밀어내며 갈 곳을 찾았다. 그렇게 밀어낸 우리나라는 서울보다도 작아 보였고, 작아진 지도 속의 도시들은 다 옆동네인 듯 보여서 그럴 리 없겠지만 어쩐지 한 번쯤은 가본 것 같았다. 마음에 쏙 드는 곳을 찾기 힘들었다. 

결국 여행지를 결정했다. 열심히 낯선 곳을 찾았지만, 오히려 이 곳은 익숙한 곳에 가까웠다. 내 기억으로 순수하게 여행을 목적으로 방문한 적은 두 번 있었고 이번이 세 번째였다. 하지만 여행 메이트는 모두 다른 이들이었다. 첫 번째 여행을 함께한 K는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서부터 실망감을 내비쳤다. 나 역시 유명한 맛집이라고 해서 찾아간 식당이 기대한 것과 달라 실망을 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서로 경쟁적으로 '별로다.'를 남발했다. 특별히 볼 게 없어 별로였고, 서울과 다를 게 없어서 별로였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아서 별로였다. 그런 마음이다 보니 눈에 들어오는 것도 없고, 구석구석 돌아다닐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큰길을 한번 훑으며 숙소를 찾던 우리는 숙소마저 별로라는 결론을 내리고 결국 반나절만에 다른 도시로 이동했다. 두 번째 여행은 장염으로 고생하다 회복하던 시기쯤에 떠난 여행이었다. 여행이 무리일 수 있었지만 회복되고 있었고 이미 약속된 거라 지키고 싶기도 했다. 먹는 것에 진심인 Y와 달리 나는 행여나 또 화장실에 뛰어가는 일이 생길까 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조심해야 했다. 뜨거운 땡볕에 앉아 만두를 먹으면서도 근처에 갈 수 있는 화장실이 어디인지부터 생각해야겠다 (하지만 그 와중에 빙수도 먹음). 이것저것 길거리 음식을 먹고 싶어 하던 Y도 내 눈치를 보면서 좀 참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사잇길을 돌아다니며 예쁜 골목, 예쁜 카페를 찾아내곤 했다. 지난번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여름휴가철이라 일단 관광객이 많아 북적거리기도 했지만 뜨거운 햇살이 부서지던 골목은 생기가 넘쳤다. 호텔로 돌아와 화장실 걱정 없이 주전부리를 먹으며 그날을 다시 떠올리다 보니 그곳은 더 이상 '별로'가 아니었고 나는 슬쩍 이 곳이 좋아졌다.

이번 여행기간에 나는 식단 조절을 하는 중이었지만 여행기간 동안 유난을 떨기 싫어서 과감하게 1박 2일간의 치팅데이를 선언했다. 그러다 보니 먹는 것에 진심이 되었고, 밥-커피-디저트 코스를 반복했다. 익숙하지만 낯설게 바라보니 아직도 먹어보지 못한 맛집이 남아있었고, 그 사이 새로 생긴 카페들은 유행만 좇는 것 같지 않고 오히려 그곳의 분위기와 더 잘 어울리면서도 세련됨을 갖고 있어서 가는 곳마다 만족스러웠다.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더 깊숙이 돌아다니며 주인의 취향이 묻어나는 매장에 감동하고, 그곳에만 있는 작은 서점들을 찾아가 큐레이션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책을 한 권 사고, 호텔과 호텔 조식에서 벗어나 동네 안쪽에 있는 한옥스테이에 숙소를 잡았다. 분명히 이미 왔던 곳인데 벽에 붙은 담쟁이덩굴처럼 골목 사이에 뻗어 있는 오래된 시장이며 여러 번 지나쳤지만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던 유적지도 들어가 보게 되었다. 볼 게 없고 할 게 없어서 반나절도 길었던 첫 여행과 달리 이번 여행은 풍요롭게 가득 채워졌다. 쉬지 않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녀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보지 않고, 하지 않아도 허기 같은 무언가가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많이 먹어서가 아니다. 새로운 마음을 위해 떠난 내 마음의 치팅데이였기 때문이다. 

어느 도시에서 버스 뒷 문에 '서울이 아닙니다. 하차할 때 카드 찍지 마세요.'라고 쓰여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이건 낯선 게 아니라 그저 신기한 것이고, 어느 도시에서나 어플로 버스 도착시간을 조회하며 카드를 찍고 버스를 타는 건 익숙한 일이다. 지난 몇 년간 다녔던 국내 여행을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도시는 다 비슷비슷했다. 오래된 동네가 있고 그 옆에는 언제부터 있었을지 모를 시장이 있고, 그 근처에는 소박하지만 한껏 힘을 준 듯한 번화가가 있고 그 번화가에는 약속한 듯이 햄버거 가게 있고 등산복 매장과 드럭스토어, 프랜차이즈 카페가 있다. 같은 시간대를 쓰고 1-2시간이면 어디든 갈 수 있는 비교적 작은 우리나라 안에서 차이가 있다면 얼마나 있을까. 도시만의 특색을 만드는 건 아주 작은 차이일 뿐이고 나머지는 비슷비슷한 모습이다. 물론 작은 차이 때문에 그 도시에 가지만 완전히 낯선 곳은 없다. 처음 왔지만 그저 그렇게 뻔하게 느끼는 것도, 여러 번 왔지만 올 때마다 새로운 것도 나에게 달렸다. 이번 여행은 그걸 절실히 느낄 수 있는 여행이었다. 익숙해서 지나쳤던 그 길의 끝에는 반드시 새로운 것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낯선 여행을 만드는 건 나의 마음이고 내가 고민할 것은 지도를 펴고 가보지 않은 곳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어디든 탐험하듯이 떠날 수 있는 새로운 마음을 찾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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