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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휘찬 Mar 15. 2021

///자가용.요약.매년

빼앗긴 희망

날이 많이 풀렸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가 만들어낸 적과의 투쟁도 1년이 훌쩍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조금씩 거리를 두고 지내야 하는 시간들이 지속되고 있다.

여행이 필요한 사람들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괴로움을 참아내기도 한다.

나는 여행을 즐기는 편이 아니라, 훌쩍 떠나고픈 욕구를 느끼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마음 한 켠이 답답하긴 하다.

이건 멋진 식당의 맛있는 식사나 예쁜 카페로 충족되는 건 아닌 것 같다.

뻥 뚫린 공간과 시원한 바람, 살랑거리는 햇빛에 파란 하늘과 흔들리는 초록, 누런 흙바닥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질 때에만 충족되는 공감각적인 허기가 있는 것 같다.

그동안 많은 것들이 익숙해졌고 당연해졌다.

어디서나 QR코드를 찍는 건 이제 낯설지 않지만,

미술관을 관람하기 위해서 미리 시간을 정해서 예약을 해야 하는 것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여전히 낯설게만 느껴지는 미술관의 예약 시간이 남아서 이 곳을 찾았다. 

크고 웅장하지만 복원공사로 인해 인위적인 느낌이 드는 경복궁보다는 소박하고 단아한 느낌이 좋아서다. 

그리고 무엇보다 편안하게 앉아 있기 좋다. 물론 천천히 한 바퀴 걷는 것도 좋다.

소박한 궁궐 안에 몇 채 안 되는 건물 중에서도 특히 뒤편에 살짝 숨어 있는 듯한 건물을 좋아한다.

궁궐의 건물과는 다소 이질감이 있지만 그래도 숨어있기에 아까운 건물임에는 틀림없다. 

굳이 찾아가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곳으로 이 곳은 고종의 커피 사랑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나 또한 커피를 사랑하고, 커피와 가느다란 인연이 있는 사람으로서 이 곳이 참 좋다.

재미있는 사실은 근처에 스타벅스가 10개도 넘게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초록색의 사이렌보다 이 곳의 초록색 지붕을 모티브로 한 커피 전문점이 있어야 되지 않나 싶다.

백 년이 넘는 시간은 이렇게 같은 하늘 아래서 만나고 있다. 

어느 날은 연회를 즐기는 고종이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바람 앞의 등불 같은 나라의 군주로서 무능한 자신을 탓하는 고종을 보기도 한다.

(물론, 나는 무당이나 신기가 있는 건 아니고 당연히 진짜 그분을 본다는 건 아니다.)

오래간만에 찾아간 이 날은

적적하게 난간 앞에서 커피를 마시며 2021년의 우리나라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 무시무시한 역병은 언제쯤 끝나려나.

언제까지 코와 입을 가리고 다녀야 하며, 언제까지 백성들은 마음껏 돌아다니지 못할까.

이 역병은 당시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노리던 강대국만큼이나 끈질기고, 매몰차다.

인정사정없이 많은 이들로부터 많은 것들을 앗아갔다.

그중에 가장 잔인한 것은 우리 마음속에 커다란 불안을 이식했다는 것이다.

불안이 이식된 사람들은 다들 주식으로, 부동산으로, 로또로 몰려들었다.

우리가 빼앗긴 것 중에서 제일 큰 것은 돈이나 직장, 사업이 아니라 희망이다.

그래서 여전히 희망을 지켜낸 사람들을 보면 응원의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그나저나 희망을 가져가면서 불안을 남겨놓다니 참으로 악질이 아닐 수 없다.

백 년이 넘는 시간이 함께 만나는 곳에 앉아있으니, 지난 1년의 시간이 꽤 무겁다는 생각이 든다.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커피를 마시며

'학교를 가지 않고 모니터로 선생님을 만났던 해가 있었지.'

'태어난 해에 해당하는 요일에 약국 앞에 줄을 서서 마스크를 사던 해가 있었지.'라고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히 기억될 해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게 이 시기를 살아내고 있는 모두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 시기를 지나쳐 갈 것을 믿는다.

조만간 미뤄뒀던 여행을 떠나고, 마음 놓고 누군가를 만나며

오랜만에 만난 이들과 맛있는 걸 먹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게 되길 바란다.

이 곳에서 연회가 열리던 그 날처럼.

그리고 고종의 커피사랑을 느낄 수 있는 이 곳에도 많은 사람들이 놀러 오게 되었으면 좋겠다.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오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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