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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휘찬 Jun 24. 2021

///검토.간밤.솔직한

덮어씌운 기억

오래전에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여름이라 땀을 뚝뚝 흘리며 걸어 올라갔던가, 옷이 두껍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래도 분명히 온 적은 있었다. 버스를 타고 산 중턱까지 올라온 것은 이번과 같았지만 그때는 다른 입구에서 올라오는 버스를 탔었다. 세 개의 시 경계가 되는 곳이다 보니 어느 쪽이든 올라올 수 있는 곳이었다. 낯선 길을 따라가는 낯익은 목적지. 십 년도 훌쩍 넘어서 다시 찾아가는 길 위에서 머릿속 깊숙한 곳에 숨어있던 기억이 하나씩 하나씩 떠올랐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굴러 떨어질 것처럼 거침없이 달리는 버스에서 문득 떠올랐다. 그때는 좁은 길에 차가 꽉 차서 올라오는데 한참이 걸렸는데... 신기했다.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 별 것 아닌 기억이 없어지지 않고 정리되어 있었다는 게. 이 날은 열린 창문 틈으로는 한증막 같은 뜨거운 바람이 밀려들어와서 빈틈없이 창문을 닫고 에어컨 바람을 맞아야 하는 날이었다.

도착하고 보니 더 많은 기억이 떠올랐다. 지난번 집에 가는 길에는 버스 정류장 낮은 돌담에 휴대폰을 두고 갔는데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다음이었다. 같이 갔던 친구의 전화로 여러 번 시도한 끝에 휴대폰 습득자와 통화를 하게 되었고, 그날 저녁 5호선의 어느 역으로 휴대폰을 찾으러 갔었다. 버스에서 내리고 보니 휴대폰을 두고 갔던 바로 그 정류장이었다. 또 이렇게 하나의 기억이 알을 깨고 나왔다. 날씨가 너무 좋았고 하늘이 높고 파랬는데, 십 년쯤 지나면 그때 하늘이 높았고 파랬었으니 가을이었나 보다고 착각할 만했다. 하지만 진짜 여름은 시작되기도 전이었다. 햇빛은 뜨거웠고 내 손목에는 시곗줄 자국이 생겼다. 

어렴풋한 기억의 길을 따라 산을 올랐다. 분명히 올라간 것은 맞는데, 이렇게 가파른 길이었나 싶었다. 그건 기억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았나 보다. 그래도 산속에 들어서니 나무 그늘 때문에 시원했다. 내가 올라가는 만큼 시원한 바람이 내려와서 오르기 어렵지 않았고 그렇게 도착한 성벽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바늘처럼 솟아오른 높은 타워만 빼면 내려다 보이는 풍경도 그대로인 듯했다. 전쟁을 피해 한양을 떠나 피난 온 인조의 눈에는 청나라 군사들이 저렇게 날카로운 바늘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싶었다. 내 경험상 웬만큼 도망가기 전까지는 어디서나 저 건물이 보였고 희미해지지도 않았다. 오래된 이곳의 기억 위에 새로운 기억을 쌓았다. 그 사이에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흐려지고 사라진 기억을 새로운 기억을 채웠으니 그것으로 만족이다.

이건 산딸기일까, 뱀딸기일까. 목표를 향해서 돌진하는 게 아니라 이런 작은 것들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시간이어서 좋았다. 집에 돌아와 예전에 찍었던 사진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뒤져봤다. 하지만 결국 내가 찍었던 사진은 찾지 못하고 외장하드에서 친구가 찍어준 사진만 몇 장을 찾았다. 아마도 내가 찍은 사진들은 CD에 저장해서 보관한 듯한데 웃긴 점은 그렇게 기간별로 꼼꼼하게 정리해서 보관한 CD는 이제 열어볼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가진 기기로는 열 수가 없다. 생각해보니 CD-ROM을 최근에는 어디서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나저나 십 년을 훌쩍 넘긴 그 사진들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겠는 건 왜인지. 혼자 보는데도 민망했다. 그때는 돌멩이 같은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왔었는데, 그때 찍은 사진보다 지금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이 더 선명하고 잘 나온다. 그래서 이번 기억은 더 선명하게 정리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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