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차분하면서도 동시에 벅차다. 두 가지의 상반된 감정이 서로 엉키거나 싸우지 않고 조화롭게 지낸다. 차분함은 하나의 일을 마쳤다는 홀가분함이고, 벅차오름은 3박 4일 간 길벗들과 함께 걷고 경험했던 진한 여운이 일으키는 파도와 파문이다. 이 기간 동안 바다, 파도, 파도소리, 비, 바람, 해안가의 자갈, 절벽 위의 산길과 함께 어울렸다. 마지막 날 식사를 하는데 TV에서 뉴스가 나온다. 듣기 싫어서 껐다. 자연의 소리는 질리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 낸 소음은 쉽게 질린다. 전에는 나 역시 속세에서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지금은? 못 이루었기에 포기나 체념을 했는지, 아니면 그들과 다른 삶을 살고 싶어서 그들과 어울리지 못했는지, 무엇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은 조금 다른 삶을 살고 싶고 살고 있다.
많이 걷고, 많이 웃고, 많이 얘기하고, 많이 마셨다. 빗속을 걸었고, 파도소리를 벗 삼아 걸었고, 바닷바람과 함께 춤추며 걸었다. 걸으며 동심으로 돌아간 우리는 사소한 얘기에도 웃고 또 웃었다. 말도 되지 않는 말을 해도 웃었고, 농을 못 치는 사람이 얘기해도 크게 웃어준다. 자신의 얘기를 하고 길벗의 얘기를 들으며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가고 나아가 상대를 통해 자신을 보기도 했다. 너의 얼굴이 결국은 나의 얼굴이라는 중요한 진리를 깨우치기도 했다. 따라서 너를 칭찬하면 나를 칭찬하는 것이고, 그 반대 역시 똑같이 적용된다. 술을 마시며 또 웃고 진지한 얘기도 나눴다. 비록 그 다음날 무슨 얘기를 했는지 제대로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전날 밤에는 무척 진지하게 서로의 마음 정원을 거닐었다. 그의 정원에 빗질을 하면, 그는 나의 정원 청소를 해준다. 나의 정원이 그의 정원이 된다. 그러니 ‘너와 나’라는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욕심이 부른 하나의 사건이 기억난다. 첫날 빗속을 걸었다. 호미곶에서 마쳐야 했는데 아쉬워 조금 더 걸었다. 예상보다 날을 빨리 저물었고, 어둠이 찾아왔다. 그때 우리는 파도가 치는 바닷가의 자갈돌길을 걷고 있었다. 랜턴을 준비해 간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동배 2리 마을회관을 지나 언덕에 올라가니 갈 길이 막막해졌다. 어둠은 짙게 내렸고, 빗줄기는 거세졌고, 택시는 불러도 오지 않았다. 운 좋게 콜택시 전화번호가 있어서 택시 두 대를 부른 후 마을회관에서 초조하게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멀리 언덕에 택시 라이트가 보이자 마음이 놓였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당황했고 겁도 났지만, 길벗들이 차분하게 대응해 주어서 다행이었다. 어둠을 무서워하는 사람이다. 어둠을 뚫고 전진할 때 겁이 없고 용기가 있어서 앞에서 걷는 것이 아니고 뒤에 오는 든든한 길벗이 있어서 나아갈 수 있었다. 바다의 파도가 두렵다. 바닷가를 걸으며 파도소리와 넘치는 파도가 덮칠 것 같다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마을이나 항구가 보이는지 확인하기 위해 발걸음을 서두른다. 어둠과 바다를 두려워하지만 길벗을 믿고 걷는다. 겁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과 그럼에도 걸을 수 있는 것은 길벗 덕분이라는 사실을 이번에 확인하게 되었다. 한 길벗은 고맙게도 손을 내밀어준다. “걱정하지 말고 나만 믿고 따라오세요.” 고맙다.
걷기에 진심인 우리는 하루 날을 잡아 새벽 5시에 모여 걷기 시작했다. 어둠이 채 가시기 전에 걷기 시작했다. 저 바다 넘어 포항제철은 24시간 일을 하는지 불빛이 환하다. 한 길벗은 그 불빛을 보며 노동자의 힘듦이 보인다고 한다. 사람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지닌 따뜻한 사람이다. 나는 그런 생각보다는 포항의 심장이 24시간 활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벅차다. 아무튼 한 가지 상황과 사실을 바라보는 시각이 각각 다르다. 그런 다양성을 이해하며 조금씩 성숙해진다. 온 세상이 모두 동그란 모양과 금색이라면 세상은 참 재미없을 것이다. 아침 식사는 길 가 벤치에서 간단하게 싸 온 음식을 먹고 걸었다. 점심 식사는 제법 품격 있는 중식당에서 자장면과 짬뽕, 그리고 탕수육까지 시켜서 먹었다. 식사를 기다리며 일정을 최종 점검한다. 원래 계획대로 걷기를 마치기로 결정했다. 더 걷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교통편이 여의치 않아 어쩔 수 없이 욕심을 내려놓기로 했다.
두 명의 길벗은 자신의 몸의 소리를 경청한 후 먼저 숙소로 가기로 결정했다. 이런 결정을 무척 존중한다. 길을 걸으며 반드시 목적지에 도착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걷는 길을 즐기며 걸으면 된다. 몸을 무리하면서까지 걷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는 길을 걸으며 자신의 몸과 마음과 대화를 나누며 걸어야 한다. 이 두 가지의 균형을 잘 잡으며 걷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멈출 때를 알아차리는 것은 매우 현명하고 용기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남은 세 명은 길을 이어서 걷는다. 원래 예정했던 지점에 도착하니 오후 4시 반 경. 약 10시간 이상 걸었다. 숙소에 돌아온 후 5만 보는 걸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서로를 격려하며 축하를 해주었다. 5만보를 걷기 위해 걸은 것이 아니고, 걷다 보니 5만보를 걸었다. 목표 위주의 삶이냐 아니면 과정을 즐기는 삶이냐에 따라 같은 결과도 질의 차이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과정을 즐겼고, 그 부산물로 5만 보라는 기록이 만들어졌으니 충분히 축하받을만한 일이다.
길을 걸으며 길벗과 대화를 나눴다. “무엇을 버리기 위해 걷고, 또 무엇을 얻기 위해 걷는가?”가 주제다. 꽤 심오한 주제다. 그냥 걸으며 되지 뭐 이런 고민까지 하며 걷느냐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나를 구속하는 것을 버리고 자유를 얻는 것”이 지금까지 찾은 답이다. 구속은 무엇이고 자유는 무엇인가라는 또 다른 주제가 나온다. 한 길벗이 그린 그림을 사진으로 본 기억이 난다. 세로 블라인드 사이로 그 뒤에 숨겨진 얼굴이 보이는 그림이다. 이 그림을 보며 떠오른 것이 있다. “얼굴을 빨간 부채로 가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 부채를 보지 말고 사람을 보아라.”라고 화두를 설명한다. 참모습이 블라인드나 부채로 가려져 있다. 사람을 보라고 하는데 우리는 블라인드나 부채를 본다. 그리고 모습을 보았다고 얘기한다. 바다를 보라고 하는데 파도를 바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바다가 잠잠하든 아니면 파도가 강하게 일어나든 바다는 그냥 바다일 뿐이다. 파도는 일어났다 사라질 뿐이다. 바다는 불구부정 부증불감 불생불멸 (不垢不淨 不增不感 不生不滅)이고, 파도는 무상이다. 바다를 보면 된다. 그리고 바다가 되면 된다. 나타났다 사라지는 파도의 형상에 빠져 자신이 바다라는 사실을 잊고 살아가는 꿈에서 빨리 깨어나야 한다. 그렇다! 우리가 걷는 이유는 바다를 보고 바다가 되기 위해 해파랑길을 걷는 것이다. 존재의 무상함을 깨달으면 파도가 바다가 된다. 삶의 과정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면 우리는 바다가 되는 것이고, 휩쓸리며 살아가면 우리는 파도가 되는 것이다. 버릴 것은 파도고, 얻을 것은 바다다. 근데 이 두 놈이 하나다. 정확히 얘기하면 불이(不二)다. 파도를 봐야 바다를 볼 수 있다. 블라인드와 부채를 들춰내야 사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을 보면 블라인드나 부채, 그리고 사람이 불이(不二)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내가 느낀 어둠과 파도의 두려움 역시 어둠과 파도만 보았기 때문이다. 어둠이 밝음의 다른 몸이고, 파도는 바다의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면 두려움이 평온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걷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