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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해파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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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고 Sep 29. 2024

에피소드라는 퍼즐 조각

지금까지 많은 길을 걸으면서 이번처럼 변화무쌍한 날씨를 맞이하기는 처음입니다. 참 다양한 날씨와 풍경을 경험합니다. 렛고님은 인생은 이처럼 예측 불가하다고 하셨고, 저는 ‘인생은 요지경’이라고 했습니다. 단 한 치의 앞날을 예상할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인생을 살아가며 미래를 꿈꾼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임을 새삼 느낍니다. 또한 지난 과거를 곱씹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다시금 체감합니다. 오직 지금-여기 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중요한 삶의 진리를 체득하기 위해 우리는 걷고 또 걷습니다. 마음챙김 걷기를 하는 이유입니다.     


에피소드#1. 오랜만에 나타난 릿다님이 산티아고 순례를 하기 위해 프랑스 왕복 티켓을 구입했다고 합니다. 제게 산티아고에 대해 물어보고 가고 싶다고 얘기를 한 사람은 많았지만 정작 티켓을 구입한 사람은 릿다님이 처음입니다. 그녀의 멋진 순례를 축하드립니다. 제가 쓴 산티아고 여행기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길, 산티아고>를 사들고 오셔서 사인을 부탁하셨습니다. 사인을 해 드리기는 했지만 무척 민망하고 쑥스러웠습니다. 다음에 출간할 책은 제가 먼저 사인해서 선물해 드리겠습니다.      


에피소드 #2. 새벽 2시 반 어둠을 뚫고 양포항을 걷습니다. 저 멀리 등을 밝히고 조업하는 배들이 보입니다. 수산 위판장에는 어민들이 물고기를 통에 담아 경매 준비를 하며 바쁘게 일하고 계십니다. 그분들에게 항구는 삶의 터전입니다. 조용히 그분들 앞을 걷습니다. 그분들은 일을 하고 우리는 걷습니다. 그들에게 항구가 삶의 터전이고 우리에게는 항구가 길입니다. 비록 서로 하는 일은 달라도 실은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살아내고 있습니다.     


에피소드 #3. 바람이 거셉니다. 파도가 방파제를 넘어 물보라를 일으킵니다. 어둠 속 한 손에는 랜턴으로 길을 밝히고 한 손에는 핸드폰으로 지도를 보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예상치 못한 산길을 만나 순간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길벗들에 의지하며 두려움을 물리칩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며 전망대에 오르니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광경이 우리를 반깁니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기 전의 하늘과 바다의 풍경은 장엄합니다. 뭐라 표현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모습 앞에서 저절로 침묵을 지키게 됩니다. 사진을 찍어도 그 장면을 모두 담을 수 없습니다. 장엄하고 엄숙하고 두렵고 멋지고 황홀하고 아름다워 경외심이 올라옵니다.      


에피소드 #4.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합니다. 방파제 바로 앞에 위치한 집 앞에 의자와 하늘을 가릴 수 있는 설치물이 있습니다. 일단 소나기는 피해 가야 합니다. 그 시설물 아래에 앉아 준비해 온 간식을 먹으며 비 내리는 바다를 구경하며 수다를 떱니다. 잊지 못할 추억입니다. 앞으로도 비 오는 날에는 바다를 찾고 싶을 겁니다. 너무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주인이 우리의 수다가 시끄러운지 눈치를 줍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조용히 머물다 가겠습니다. 덕분에 잘 쉬다 갑니다. 감사합니다.     


에피소드 #5. 우비를 입거나 우산을 펼치면 비는 그칩니다. 우비나 우산을 접으며 비는 내립니다. 비와 우리는 모종의 게임을 하며 서로 즐깁니다. 마치 술래잡기 놀이를 하는 것 같습니다. 우비를 입고 벗고, 우산을 펼치고 접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은 불편하기도 하지만 즐거움이 되기도 합니다. 싫다고 거부하거나 그에 맞는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결국 불편함은 우리의 몫이 됩니다. 그러니 그러려니 하며 상황에 맞춰 살아갑니다. 이 또한 삶의 지혜입니다. 길을 걸으며 몸의 체온으로 옷은 금방 마릅니다. 마를 때가 되면 또 우리와 게임을 하자며 강한 비바람이 몰아칩니다. 비바람과 서로 술래잡기를 하며 동심으로 돌아갑니다.     


에피소드 #6. 13코스를 마친 후 커피숍을 찾기 위해 14코스를 걷습니다. 이 말이 맞습니다. 14코스를 더 걷기 위해 걸은 것이 아니고 커피숍을 찾기 위해 우리는 걷습니다. 멋진 커피숍을 발견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들어가 커피를 주문합니다. 릿다님께서 크게 쏘셨습니다. 릿다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우리는 몸과 마음을 쉬며 창가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즐기며 구경합니다. 그 풍경이 참 멋집니다. 커피숍 앞에서 각자 우산을 편 채로 사진 한 컷을 남깁니다. 그 사진 한 컷이 이 여정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커피숍에서 나와 걷기 시작합니다. 조금 후에  스틱을 두고 오신 분이 그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채 부탁하기도 전에 범일님이 달려갑니다. 전화가 옵니다. 일행 중 누군가가 핸드폰을 두고 가셨는데 확인 부탁한다는 전화였습니다. 글자님은 자신의 핸드폰을 두고 온 사실을 잊고 걷고 있었습니다. 분실물을 찾은 후 기쁜 마음으로 걷는데 강한 비바람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강한 인사를 합니다. 우리는 비를 맞이할 준비를 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온몸이 비에 젖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웃고 있습니다. 비정상 모임입니다. 그래서 더욱 마지막 비바람이 인사를 한 이 오르막길은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에피소드 #7. 차를 타고 식당을 찾기 위해 구룡포로 향합니다. 구룡포에는 적산가옥이 유명한 카페와 식당거리로 변화하여 우리를 맞이합니다. 비가 몰아치는데도 손님이 무척 많습니다. 우연히 들어간 노포에서 무슨 국수, 무슨 찌개, 무슨 음식을 주문합니다. 이 지방 향토 음식인데 음식 이름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소맥은 기본으로 주문합니다. 그리고 음식과 수다와 웃음이 뒤섞이며 이 여정의 대미를 장식합니다.     

 

릿다님, 오랜만에 만나 반가웠고, 산티아고 순례를 축하드립니다. 인생은 예측불가하다는 사실을 체득한 렛고님의 멋진 인생을 축하드립니다. 길을 걸으며 해방감을 만끽하시고 자유를 찾아 떠나는 바다님의 아름다운 인생을 축하드립니다. ‘지금-여기’에서 떠나기 싫다며 투정을 부리는 글자님의 동심을 응원합니다. 커피숍으로 뛰어가고 사진을 찍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뒤풀이에서 좌중을 사로잡는 범일님의 대활약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다 차려 놓은 상에 수저를 그저 슬며시 수저를 올려놓습니다.    


삶은 에피소드라는 퍼즐 조각이 맞춰지고 맞춰가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에피소드가 우리의 여정이 되듯 우리가 만들어낸 또는 주어진 삶의 에피소드가 우리네 인생이 됩니다. 어느 한쪽도 버릴 것이 없는, 버릴 수 없는 소중한 에피소드입니다. 비록 어느 한 조각에는 아무 무늬나 글이 없는 무의미하게 보이는 것이라도 그것이 있어야만 전체적인 그림이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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