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걷고 Nov 05. 2024

동심(童心)은 현재심(現在心)

<에피소드 #1>

손녀 보윤이가 어린이집 다녀오며 울면서 들어온다.

“보윤아, 왜 그래? 왜 울어?”

“엄마가 자전거 갖고 어린이집에 오기로 했는데, 약속 안 지키고 안 갖고 왔어. 엄마는 내 말을 듣지 않아.”

얼른 방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안아준다.

“그래서 속이 상했구나.”

“응, 엄마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속상했어.”

“많이 속상했어?”

“내 말을 듣지 않고, 엄마는 하고 싶은 대로 해.”


더 이상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아이 편이나 엄마 편도 들지 않고 그냥 안아준다. 누가 잘했고 잘못했다고 시비를 따지지 않고 아이의 속상한 마음을 안아준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아이는 내 양눈가를 잡아당기며 표정이 우습다며 웃는다. 나도 손녀 눈을 똑같이 잡아당기며 웃는다. 조금 후 아이는 내 무릎에서 내려와 마치 아무 일도 없듯이 엄마에게 달려가 뭐라고 웃으며 얘기를 한다.     

 

<에피소드 #2>

아침에 명상을 하고 있다.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를 지켜본다. 그리고는 아이 웃음소리가 들린다. 눈을 뜨고 아이를 바라본다. 그새 보윤이는 내 옆에 서서 나를 지켜본다. 

“할아버지, 왜 기도 해?”

“보윤이 건강하고 즐겁게 지내라고.”


그리고 아이를 안아준다. 내 품에서 장난을 치더니 아침 식사하러 가자고 손을 잡아 끈다. 아마 아내나 딸이 나를 부르라고 시킨 것 같다. 식탁에 앉아 아이는 아무 일도 없듯이 엄마, 동생과 이런저런 장난과 수다를 떨며 식사를 한다. 나와의 즐거운 시간도 이미 과거가 되었다.     


아이의 마음을 본다. 기분 나쁜 일도, 또 좋은 일도 금방 잊고 지금 하는 일을 하며 즐겁게 지내고 웃는다. 엄마와의 속상한 상황은 이미 사라졌다. 내게 안겨 놀던 즐거운 상황도 이미 과거 일이다. 그리고 엄마와 웃고 떠들거나, 식탁에서 밥 먹으며 웃으며 논다. 거울에 잠시 웃을 수 있는 상황이 비쳤고, 또 속상한 상황이 비쳤다. 그리고 두 가지 상황은 금방 사라지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비친다. 그 일은 아주 잠깐 머물다 다른 상황과 그림으로 교체된다. 아이는 속상할 때 속상하다고 울고 말한다. 기분 좋을 때 좋다고 장난하며 웃는다. 자신의 감정과 경험이 자신의 표현과 일치한다. 그리고 과거나 미래에 머물지 않고 지금 여기에 머문다. 아이가 행복한 이유다. 부디 아이들이 이런 마음으로 평생 지낼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반면 우리들은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가면 하나로 부족해서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공상과 망상을 안고 살아간다. 사회적 가면은 자신의 표현과 경험이 일치하지 않는다. 속상한데 웃거나, 힘든데 힘들지 않은 척을 한다. 그리고 혼자 속상해하거나 외로워하며 자신을 더욱 힘들게 만든다. 물론 사회생활을 하며 자신의 경험과 표현을 일치하며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때로는 표현하고, 때로는 양보하고, 때로는 스스로 삭이며 지낼 수밖에 없다. 사회라는 조직 내에 생존하기 위한 방편이다. 표현과 양보 또는 자체소화하는 것의 균형과 조절을 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현재심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작은 실수도 하게 되고, 때로는 큰 실수를 하기도 한다. 이미 실수는 엎어진 물이다. 이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없다. 물론 사과를 하며 어느 정도 주워 담을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물의 자국은 남아 있을 수도 있다. 이 자국은 자신이 남기거나 또는 타인이 남기기도 한다. 아니면 아무 일도 없듯이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지나가기도 한다. 때로는 실수를 한 사람은 그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상대방이 기분 나빠할 수도 있고, 반대로 작은 실수로 본인은 너무 큰 실수를 한 것처럼 미안해하지만 상대방은 아무 일도 없듯이 받아들일 수도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일이다. 더 이상 과거 일로 괴로워하지 말자.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즐겁게 하자. 마찬가지로 미래에 대한 공상과 망상도 무의미한 일이다. 행복하기 위해 미래를 설계하면서 정작 지금 현실이 불행하다면 언제 행복할 수 있을까? 행복의 기본 바탕은 지금-여기에 있다.      


과거 일로 스스로를 괴롭히거나 과거의 기억과 경험으로 인해 남을 원망하는 마음이 쌓인다면 결과적으로 자신을 갉아먹는 일이 된다.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 일로 걱정한다면 그 순간 현재가 사라지기에 미래는 더욱 암울해진다. 니체는 “우리가 할 일은 지금 주어진 일이다. 그 외에 더 이상 우리가 할 일은 없다.”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지금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이후에 못했던 과거의 일에 대한 후회가 들 것이고, 지금 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아이는 좋은 일이나 안 좋은 일이나 금방 표현하고 잊어버리고 지금을 살아간다. 물론 그 기억들은 남아있겠지만 이미 흘려보냈기에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좋았던 기억과 좋지 않았던 기억 모두 추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반면 우리는 그렇지 않다. 좋은 기억을 자꾸 회상하며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현재를 사라지게 만들 뿐이다. 또한 나쁜 기억을 통해 지금-여기의 감정과 경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적인 마음을 쌓아간다. 결과적으로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 모두 과거의 세상이다. 지금-여기에 살면서 과거를 살아가고 있다.      

예전에는 어떤 실수를 하거나 또는 했다고 생각하며 많은 고민을 하며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낭비했다. 실수를 만회하거나 마치 없었던 일로 만들기 위해 별의별 생각을 다하기도 했다. 대부분은 나 혼자만의 고민이었고, 상대방은 아무 일도 없듯이 반응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을 수도 있지만, 아마 그들이 너그러운 마음을 그냥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수많은 시간과 생각을 과거에 매몰된 채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과거나 미래에 매몰되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손녀처럼 경험과 표현이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가능하며 과거나 미래의 일로 더 이상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 실수한 것은 바로 사과하면 된다. 그러면 내 할 일은 끝난 것이다. 사과의 수용 여부는 상대방의 몫이다. 그 이후의 일은 그다음에 생각하면 된다.      


손녀와의 경험을  통해 얼마나 과거나 미래에 묶여 살아왔는지 잘 볼 수 있었다. 동심은 현재심이고, 행복은 현재에 있다.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금-여기의 삶을 살아야지, 과거나 미래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결정하는 것이 지금-여기에서 내린 것인지, 아니면 과거나 미래가 내린 것인지 잘 살펴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낮아짐의 미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