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심은 사람
장 지오노의 단편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의 주인공인 엘제아르 부피에는 황무지인 마을에 나무를 심어 무성한 숲을 만든다. 그의 일과는 매일 100개의 상수리나무 열매를 정성스럽게 골라 심는 일이다. 깊은 산속 오두막 주변에서 시작해서 점점 더 멀리까지 가서 열매를 심는다. 수십 년 동안 이 작업을 한 덕분에 황무지는 무성한 숲을 이루고, 숲은 새와 꽃을 불러들이고, 개울이 생기며 사람들이 찾아와 마을을 이룬다. 정작 이 숲을 만든 사람은 자신 덕분에 활기찬 마을이 만들어진 사실조차 모른 채 매일 열매를 심는다. 한 번은 자신이 심은 만 그루 나무가 모두 죽는다. 그는 다시 수종을 바꿔 심기 시작한다. 실망하기보다 다시 시작한 것이다. 누군가가 알아주는 작업을 한 것이 아니고, 자신이 할 일을 한 것이다. 니체는 “자신의 할 일이 궁금한가? 오늘 주어진 일이 당신의 일이다.”라는 말을 했다. 엘제아르 부피에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날 자신이 할 일을 할 뿐이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할까? 주어진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이미 완벽한 삶이다.
소양호를 만들기 위해 많은 농토가 소실되었고 주민들이 이주를 하며 사라진 길을 다시 잇기 위해 인제천리길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2015년부터 답사와 길잇기 작업을 시작했고, 2020년 7월에 사단법인 인제천리길이 설립되었다. 김호진 대표와 법인 임직원의 노고 덕분에 이 길이 만들어졌다. 남면사무소에서 김대표와 운영팀장을 만나 간단한 소개 말씀을 들으며 일종의 결단식을 했다. 앞으로 우리는 매월 한 번씩 걸으며 36구간 505km를 모두 걸을 것이다. 김대표와 운영진은 스탬프북, 안내책자, 기념 배지, 등산용 의자를 선물로 나눠주며 우리의 방문을 반긴다. 우리를 대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길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고맙다. 길을 처음 만든 사람들은 길 없는 길을 구상하고 연결하고 꾸준히 변경하고 수정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길을 걸으며 조금씩 길의 모습을 갖추어간다. 아무리 멋진 길도 사람이 찾지 않는다면 길은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길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지만 지리산 둘레길의 지금 모습이 그렇다. 매우 안타깝다. 인제천리길은 부디 많은 사람들이 방문에서 길 자체도 행복을 느끼도, 그 길을 걷는 사람들도 행복하길 기원한다. 또한 길을 통해서 인제 주민들과 전 국민이 소통하는 좋은 계기가 되길 바란다.
호수 주변을 따라 걷는다. 소양호 주변에 막 조성된 앳된 나무들이 애처롭게 서있다. 나무들의 애처로운 모습은 우리를 만나 금방 활기를 띤다. 소양호의 푸름과 하늘의 푸름 사이에 산이 서있다. 산도 푸르다. 온통 푸른 세상이다. 푸름은 활기다. 자연의 활기가 우리를 활기차게 만들어주고, 우리의 활기는 다시 자연에게 전달된다. 멋진 시너지 효과다. 도로를 따라 걷다 임도로 진입한다. 임도로 진입하는 길은 야생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 안내 리본과 표식은 잘 되어 있지만, 길 자체는 야생이다. 이런 길이 늘 그리웠다. 아직 사람 손이 덜 탄 길. 이 길은 우리를 반기고, 우리는 이 길을 반긴다.
임도는 산 허리를 잘라내어 만든 느낌이다. 산 허리는 아직도 잘린 상처를 드러내며 신음하고 있고, 임도로 만들어진 산길 역시 고통스러운 듯 서걱서걱하다. 마치 치료를 위해 몸의 일부분을 잘라내여 다른 곳에 붙인 느낌이다. 그 고통스러운 길을 걸으며 우리의 고통을 치유받는다. 이상하다. 주변의 고통을 통해 나의 고통을 치유한다. 또한 우리가 이 길을 걸으며 잘라진 산허리와 임도는 우리에게 고통을 호소하며 자신의 상처를 치유한다.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치료해 준다. 그런 면에서 이 길은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순례길이다. 산을 오르는 길은 지그재그로 연결된 넓은 임도로 피레네 산을 연상시킨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떠오른 이유가 바로 이 임도 때문이다. 그리고 멀리서 바라본 임도는 차마고도를 연상시킨다. 차마고도는 중국의 차와 티메트의 말을 교환하기 위해 개통된 육상 무역로다. 그런 면에서 차마고도는 생존의 길이다. 살기 위해 만들어진 길이다. 따라서 인제천리길은 순례길이자 생존의 길이다.
바람이 거세다. 바람소리를 들으며 세속의 잡소리를 씻어낸다. 차갑고 시원한 바람은 세속에 더러운 먼지를 날려버린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은 속세의 티를 모두 털어버리라고 한다. 소양호의 파아란 물은 우리의 찌든 때를 씻어내라고 한다. 임도가 좋은 이유는 세속의 소리와 단절된 원시적인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길을 걸으며 우리의 심신은 저절로 치유된다. 경기둘레길의 숲길은 임도로 조성되어 있다. 이 숲길은 신비의 숲이다. 반면 인제천리길의 임도는 상처를 그대로 드러낸 아직도 아픈 길이다. 또 이 길이 아픈 이유는 소양호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소양호는 많은 사람의 신음과 고통을 안고 만들어진 호수다. 그 고통이 고요한 호수 저 밑바닥에 흐르고 있다. 산과 호수 모두 고통을 안고 있다. 그래서 이 길을 걸으며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다. 자연의 고통과 주변 사람의 고통이 나의 것이 되어간다. 그 아픈 길을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걷고, 이 길을 사랑하는 것 외에는 없다. 그리고 길 위에서 우리의 상처 역시 치유받을 수 있다. 우리가 자연을 품어주듯 자연이 우리를 품어주기 때문이다.
처음 만난 사람도 있고, 오랜만에 만난 사람도 있다. 이들이 어디서 왔든 또 무엇을 했든 우리는 모두 같은 길을 걷는 길벗이다. 걷기를 좋아한다는 이유, 또 길을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만난 우리는 길을 걸으며 하나가 된다. 길 위에 차별은 없다. 다만 길을 걷는 사람과 걷지 않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길은 걷는 사람이 길의 주인공이 되고, 길을 걷는 사람은 우리를 받아준 길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리고 길을 만들어 준 분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인제천리길을 만들기 위해 애써주신 김호진 대표와 운영팀장님, 그리고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 감사함에 보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이 길을 완보하는 것이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언젠가는 이 길을 완보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냥 걷고 또 걷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