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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리 모자

by 걷고

범일님이 지난주 함께 걸을 때 바다님과 나에게 사파리 모자를 선물했다.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으니 기분이 좋다. 더군다나 걷기에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모자다. 메쉬 타입이어서 바람이 잘 통하고 모자챙이 있어서 햇빛을 가리기에도 안성맞춤이다. 그가 사파리 모자를 18개 구입해서 선착순으로 만나는 걷기 학교 회원들에게 나눠준다는 글을 밴드에 올렸다. 가끔 범일님은 상황에 맞는 또는 개인 맞춤형 선물을 예고 없이 한다. 무릎이 아픈 사람에게는 무릎 보호대를, 발에 물집이 잡히는 사람에게는 편안한 깔창을, 비 오는 날에는 비닐로 만든 일회용 스패츠, 바지나 비옷을, 스틱용 발톱 등을 선물한다. 그 선물을 받고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한다. 즐거워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하다. 나눔의 즐거움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는 말이 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님이 자식들에게 베푸는 사랑이 무주상보시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주변 사람들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도와주기 위해 연탄 봉사를 하는 마음, 얼굴 없는 천사들의 보시행, 무료 급식소에서 급식 봉사를 하는 마음, 지인들이 힘들어할 때 옆에서 지지하고 응원하는 마음 등 수많은 다양한 나눔이 있다. 우리가 길을 걸으며 힘들어하는 길벗의 짐을 나누어 드는 것도, 배고픈 길벗에게 간식을 나누어주는 것도, 고민이 있을 때 들어주는 것도 무주상보시다.


무주상보시에는 세 가지가 없어야 한다. 주는 사람, 받는 사람, 주고받은 물건이나 마음이다. 주었다는 마음이 있으면 받기를 원한다. 받지 못하면 서운해한다. 받았다는 마음이 있으면 마음의 빚을 안고 살아간다. 갚기까지는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다. 주고받은 물건이 있으면 그 물건과 최소한 동등한 가치의 물건을 주고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일어나 그 기대가 어긋나면 서운해하고 불편해한다. 이 세 가지가 없는 베풂이나 나눔을 할 때 받는 사람이나 주는 사람이나 모두 행복을 느낀다. 받은 사람은 자신에게 베풀어준 사람에게 되돌려주기도 하지만, 받은 사랑을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며 아름다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무주상보시하면 김장하 선생님이 떠오른다. 그는 전국 최연소로 한약업사 시험에 합격한 후 한약방을 개업했다. 벌은 돈을 개인을 위해 쓰기보다는 지역사회를 위한 사회운동과 자선사업을 하며 나눔을 실천해 온 독지가다.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한 후 국가에 기부채납하여 공립학교로 전환시키기도 했다. 20대 젊은 시절부터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남몰래 장학금을 주었는데, 그 장학금을 받은 사람이 1,000명을 넘는다고 한다. 기자들은 그를 인터뷰하기가 가장 어렵다고 한다. 글을 써야 하는 기자 입장에서는 선행을 스스로 자신의 입으로 밝히지 않는 그가 당연히 힘든 인터뷰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엮어서 만든 영화 <어른 김장하>도 있다.


경기 둘레길을 걸을 때 우비를 사서 참가자 전원에게 나눠주었던 적이 있다. 마침 비가 많이 오는 날이어서 모두 우비를 입고 장대비를 맞으며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가득한 채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 우비를 입고 행복하게 걸었던 기억이 있다. 범일님이 선물한 모자를 쓰고 함께 걷는 모습을 그려 본다. 아름다운 행진이 될 것이다. 시간이 흘러 누가 모자를 선물했는지 잊고 살아갈 것이다. 다만 함께 모자를 쓰고 걸었다는 추억만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아름다운 추억이다. 범일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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