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어느 가수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던 TV 방송을 본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자신이 ABC에 올라온 것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그 이후에 TV에 출연해 ABC 트레킹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을 자랑하는 것을 몇 번 들었다. 그의 모습을 보며 약간의 부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고 ABC를 가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 당시 내게 ABC는 그냥 남의 얘기일 뿐이었고, 나와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으로만 느껴졌을 뿐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 기억이 남아있는 것을 보니 이미 ABC 트레킹에 대한 씨를 이미 뿌리고 있었나 보다.
2023년 해파랑길을 걸으며 렛고님이 ABC 얘기를 꺼냈을 때에는 그냥 흘러가는 얘기로만 들었다. 연말 걷기에서 본각님이 다시 얘기를 꺼냈고, 걷자님이 준비를 맡아주겠다고 했고, 그때 걸었던 길벗이 모두 함께 가자는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그리고 오랜 기간 걷자님이 검색을 통해 여러 여행사의 견적과 일정을 비교 분석한 후 한 곳을 결정했다. 사전 모임과 두 번의 전지훈련을 진행했고, 이제는 각자 트레킹을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멀게만 느껴졌던 시간이 흘러 드디어 13일 후에는 출발한다.
지금 나의 시계는 안나푸르나 트레킹 일정에 맞춰져 있다.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는 모르지만, 출발 일정에 맞춰 D-며칠로 날짜를 확인하고 있다. 머릿속은 온통 안나푸르나 생각으로 가득하다. 길에 대한 상상이 아니고,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다. 들고 갈 물건을 방바닥에 늘어놓고 매일 한두 번씩 보며 뺐다 넣었다를 반복하고 있다. 코스는 이미 정해져 있고, 그 길을 따라 걸으면 되기에 굳이 검색하거나 더 이상 알아볼 필요가 없다. 길에 대한 사전 지식은 알면 알수록 기대감은 줄어든다. 숙소와 음식 걱정도 할 필요도 없고, 항공이나 이동 관련 교통편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참 편안한 트레킹이다. 걷기 위해 필요한 개인 물품만 챙기면 되니 이보다 더 편안한 트레킹은 없다. 다만 고산병이 신경 쓰일 뿐이다.
준비물을 챙기며 문득 든 생각이 있다. 가이드와 숙소가 준비되어 있고, 트레킹족도 많고, 현지인도 이미 살고 있는 곳이다.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을 가는데 굳이 유난을 떨며 준비를 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이 든다. 그냥 편안한 옷과 등산화를 신고, 고산병 대비를 한 후 걸으면 되지 않을까? 필요한 물품은 현지에서 구입해도 될 것이고, 문제가 생기면 현지인과 동료들이 알아서 도와줄 것이고, 고산병으로 힘들면 굳이 ABC까지 가지 않고 아랫마을에 머물며 편안한 휴식을 취하면 되지 않을까? 고산병, 추위에 대한 대비, 기타 필요 물품을 준비하며 너무 수선을 떠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안감에 이것저것을 챙기고 있다. 이율배반적인 나의 모습을 본다.
마치 지구 원정대로 미지의 세계를 탐험이라도 하듯 주변 사람들에게 ABC 트레킹을 한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나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일이다. 지인들은 축하한다며 안전하게 다녀오라고 인사를 한다. 자신의 일이 아닌 남의 일을 축하해 주는 착하고 고마운 사람들이다. 한 선배와 두 누이는 잘 다녀오라며 격려금도 보내주었다. 서로를 걱정하고 축하하고 챙겨주는 모습이 보기 좋다. 이번 트레킹을 하면서도 서로를 챙겨주며 즐겁고 안전하게 걷기를 기대해 본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걷거나 움직일 때 환자처럼 움직이라고 한다.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몸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도록 늘 마음챙김을 하라는 의미다. 고산병 예방을 위해서 몸과 머리를 따뜻하게 하고 천천히 걸으라고 한다. 두 번의 전지훈련을 하며 천천히 걸으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는다. 하지만 고산을 오르다 보면 저절로 속도는 줄어들 것이다. 의식적으로 천천히 병자처럼 움직이며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면 트레킹 자체가 좋은 수행법이 된다. 사진을 찍는 것도 좋지만, 그 장면을 감상하며 시각 명상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그 아름답고 웅장한 경치와 자신이 하나가 되는 것도 좋은 명상법이다.
안나푸르나가 매력적으로 느껴진 이유는 네팔이라는 나라, 부처님의 나라, 네팔과 인도 접경지인 달람 살라에 계신 달라이라마, 이 세 가지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번 트레킹은 단순한 트레킹이 아니라 수행을 위한 트레킹이 되기를 바란다. 마주치는 자연 경치, 만나는 사람들, 함께 걷는 길벗 모두 나의 스승이다.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몸의 움직임을 살펴보는 위빠사나 수행, 마음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며 지금-여기에 머무는 마음챙김을 통해 수행을 이어갈 수 있다. ABC 트레킹은 코스 전체가 수행터이고, 나는 수행자가 되고, 함께 걷는 길벗과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도반이자 스승이 된다.
이번 트레킹을 준비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 준비를 위해 애써 준 걷자님, 일정을 준비해 준 여행사 대표님, 동참하지도 않으면서 격려금을 기부해 준 범일님과 오공님께 큰 빚을 졌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하며 포터와 가이드, 요리사, 로지에서 근무하는 모든 직원들, 트레킹 코스를 만들고 관리하는 사람들, 길 주변에서 장사를 하는 상인들 등 많은 사람에게 큰 빚을 지게 될 것이다. 길은 내가 걷지만,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와 자연의 허락이 있어야만 길을 걷고 ABC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다. 그러니 겸손한 마음을 지니고 수행자의 마음으로 걷고 사람을 대해야 한다. 나는 이 길을 걸으며 그 순간만이라도 수행자로 지내고 싶다. 그리고 그 수행의 힘으로 속세에 돌아와 평온하게 살아가고 싶다. 내가 안나푸르나를 걷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