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다짐

by 걷고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다시 새해 다짐을 한다. 비록 그 다짐이 사흘을 넘기지 못하더라도 단 하루만이라도 그 다짐을 지켜 나간다면 안 하는 것보다는 좋지 않을까? 그간 살아온 삶은 ‘헛짓’에 불과하다는 글을 어제 써서 올렸다. 그 ‘헛짓’은 바로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와 욕심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새해에는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내려놓고, 뭔가를 얻고자 하는 욕심도 내려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 아상(我相)을 내려놓는 작업을 하기로 자신과 약속을 해본다.


“공자는 특히 네 가지를 금지했다. 근거 없이 억측하지 말고,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말고, 고집부리지 말고, 자기만 옳다고 하지 말라.” (백해연 글 인용)


우리는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억측을 하며 그 억측이 진실이라고 믿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믿고 따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억측을 억측이라고 얘기하면 일축하며 화를 낸다. 반증을 대라고 하면 자신만의 반증을 얘기하는데, 그 자체가 억측일 경우도 많다. 객관적이지 못한 주관적인 판단을 객관적이라고 고집한다. 억측을 하는 사람은 자신만의 굳어진 사고방식으로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판단한다.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강조하고 강요한다. 다른 의견을 얘기하면 듣지도 않을뿐더러 괴변을 늘어놓으며 자신의 결정이 맞다고 한다. 억측과 독단적인 결정은 고집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고집이 아니고 올바른 객관적인 판단이라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늘 옳다고 강조한다.


이 글을 꼼꼼히 뜯어보면 결국 아상(我相)을 경계하라는 글이다. ‘나’가 허상이니 그 허상에 속지 말고, ‘무아’라는 실체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정견을 갖추라는 글이다. 우리가 판단하는 모든 기준은 과거의 경험이 바탕이 된다. 따라서 어떤 상황이나 판단도 객관적일 수가 없다. 자신의 안경과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측정하기에 이미 객관성은 사라지고 오직 객관이라고 주장하는 주관만이 남는다. 주관은 과거의 경험과 의식이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하다. 불교에서는 이런 주관적 세상을 꿈, 환영, 물거품, 그림자와 같다고 한다.


허상을 걷어내면 그다음에 남는 것은 ‘오직 모름’ 밖에 없다.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생각과 의식 자체가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오직 모름’만 남는다. 이것이 ‘앎’이라는 어리석은 지식에서 ‘오직 모름’이라는 현명한 지혜로 가는 유일한 통로다. ‘앎’이 사라진 ‘오직 모름’의 세상에는 ‘나’라고 주장할만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생각, 감정, 의식, 감각 등은 이미 ‘나’가 아니다. 단지 ‘나’라고 생각하는 ‘나’만 있고, ‘나의 감정’이라고 느끼는 ‘감정’만 있을 뿐이다.


‘나’가 ‘나가 아님’을 알게 될 때 비로소 ‘무아’를 이해하게 된다. ‘무아’를 이해하게 되면 괴롭다는 주체가 사라진다. ‘고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동시에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세상은 매 순간 변한다는 사실도 이해하게 된다. ‘무상’에 대한 이해다. 무상, 고, 무아에 대한 통찰은 ‘오직 모름’을 통해서 일어난다. ‘오직 모름’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 무언가를 안다고 생각하고 말한다면 이는 옳지 않다. 아는 것이 없으므로 아는 체할 수도 없다. 따라서 ‘헛짓’은 저절로 할 수 없게 된다. 말을 할 수 있는 벙어리가 된다면 좋겠다. 새해 다짐이자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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