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통증과 고통을 동일시한다. 하지만 이 둘은 분리되어야 한다. 통증은 신체적인 아픔이다. 통증은 자연적인 현상으로 몸을 지닌 우리가 느끼는 아픔이다. 부딪치면 아프고, 찌르면 따갑고, 추우면 움츠려든다. 신체의 감각이 외부 자극과 만나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 통증은 시간이 지나면 변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신체 한 곳의 아픔이 24시간 내내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지속되지 않는다. 아프다가도 화장실 가게 되면 그 순간 아픔은 사라진다. 물론 다녀온 후 다시 계속될 수는 있다. 큰 고민거리가 생기면 통증은 순간 사라진다. 통증을 어떤 평가나 판단 없이 그냥 관찰하게 되면 처음에는 그 통증이 크게 느껴지다가도 시간이 지나면서 통증이 사라지거나 위치가 변하기도 한다. 그 통증은 신체가 느끼는 것으로 일어났다 사라지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통증을 통해 ‘무상’을 체득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무상’을 통해 변하는 것은 실체가 없다는 진리도 통찰할 수 있다. ‘무아’에 대한 통찰이다.
통증을 느낀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시체는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통증이 통증으로만 끝난다면 세상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 통증은 ‘나의 몸’이 느끼는 감각에 불과하지, 그 자체가 ‘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통증에 의미를 부여하고 생각과 감정을 만들어내며 통증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고통의 시작이다. 통증은 생각과 감정이라는 연료를 공급받으며 불타 오르고 더 큰 고통으로 변한다. 생각과 감정은 과거나 미래가 만들어 낸 허상일 뿐이다. 현재라는 시점에는 오직 감각, 즉 통증만 존재할 뿐이다. 통증은 발생하고 사라지고 위치가 변하는 ‘무상’의 성질을 지니고 있기에 우리를 오랫동안 괴롭힐 수 없다.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기만 해도 우리는 편안하게 통증을 참아낼 수 있다. 통증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며 삶을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이 상황을 화살에 비유하여 말씀하셨다. 화살이 날아와 맞았다. 신체의 통증이 시작된다. 그러면 그 통증을 없애기 위해 화살을 뽑고 치료를 받으면 된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화살을 뽑거나 치료를 받는 대신에 누가 왜 이 화살을 쏘았고, 화살에 묻은 독의 성분은 무엇이고, 화살을 쏜 사람을 잡기 전에는 치료를 받을 수 없다며 스스로를 고통으로 몰고 간다. 우리가 할 일은 화살을 뽑는 일뿐이다.
삶도 이와 같다. 누군가와 어떤 문제로 언쟁이 일어나거나 감정이 상했을 때 할 일은 자신의 화살을 뽑는 일이지, 상대방과 시비할 일이 아니다. 누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시간만큼 괴로움은 지속된다. 원인을 파악하는 만큼 괴로움은 지속된다. 자신은 객관적이라고 주장하는 만큼 그 객관성은 주관성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효과만 만들어낸다. 시비를 따질 일 없이 자신의 상한 감정을 보살피며, 그 상한 감정을 스승으로 삼아 자신의 마음을 살핀다면 괴로움의 늪에서 헤어 나올 수 있다. 살아가며 누구나 고통을 느끼고 삶의 부침을 맞이한다. 삶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고성제(苦聖諦)가 부처님 첫 번째 성스러운 가르침이다. 이 고통을 완전히 제거하려 하면 할수록 괴로움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 고통스러운 상황은 늘 존재하지만, 그 고통이 나를 괴로움의 늪에 빠뜨릴 수는 없다. 주어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어떤 감정이나 생각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 된다. 주어진 상황은 업보다. 상황이 발생한 시점은 과거다.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다만 과거와 같은 생활 패턴을 반복하지 않고, 새로운 선택과 결정을 내림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 마음챙김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