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계획은 8코스 마치고, 이어서 9코스까지 걸을 계획이었습니다. 어제 하늘공원을 걸으며 추운 날씨 탓에 길이 많이 얼어있고, 눈도 녹지 않아서 늘 걸었던 길임에도 무척 조심스럽게 걸었습니다. 9코스는 산길이어서 조금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8 코스만 걷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고 나니 갑자기 시간과 마음이 무척 여유로워졌습니다. 참가 신청자 두 분께 올림픽 공원 역 주변 빵집에서 차 한잔 마시고 산책하듯 걷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오전 10시 이전에 빵집에 들어가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재미도 좋습니다.
그래도 걸으러 나왔으니 걸어야겠지요. 모두 옷을 단단히 잘 챙겨 입고 나와서 그런지 추위는 별로 느끼지 못하고 조금 속도를 내어 걸었습니다. 탄천을 걷는데 갑자기 글자님께서 오체투지를 하며 걷는 것도 좋을 거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습니다. 오늘 글자님 복장, 특히 모자가 티베트 라마승 복장과 조금 비슷했습니다. 그 복장 때문에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오체투지! 갑자기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사찰 성지 순례가 떠올랐습니다. 실은 예전부터 마음에 지니고 있던 프로젝트입니다. 한국 불교 삼보사찰인 송광사, 해인사, 통도사를 걸어서 순례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불자로서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순례입니다. 그동안 잊고 지냈었는데, 글자님의 오체투지라는 단어 덕분에 잊고 있었던 계획이 소환되었습니다.
걸으며 혼자 상상을 해봅니다. 그리고 그 상상을 렛고님과 글자님께 떠들어 보기도 했습니다. 아마 두 분은 장난으로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혼자 계획을 해 봅니다. 코리아 둘레길을 모두 마치는 데 약 6년 정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 중간에 제주 올레길도 완보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코리아 둘레길 네 개 구간마다 전자책을 발간할 계획입니다. 완보 후 네 권의 전자책을 한 권의 종이책으로 발간할 계획입니다. 그러면 7년 정도 걸리겠지요. 그 이후에 삼보사찰 성지 순례를 하면 될 거 같습니다. 시간이 많으니 천천히 코스를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혼자 걸어도 좋고 길벗과 함께 걸어도 좋습니다.
소설가 최인호는 ‘길 없는 길’이라는 소설을 쓴 작가입니다. 경허 선사의 족적을 추적해서 쓴 소설입니다. 경허 선사 이전에 한국 선불교의 맥은 끊겨 있었습니다. 하지만. 길 없는 길을 경허 선사가 개척해서 후학들에게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한국 선불교의 맥을 이어 주신 분이 바로 경허선사입니다. 오체투지, 길 없는 길, 삼보사찰 순례, 서로 연결되는 단어입니다. 오체투지는 자신을 낮추고 버리는 행위입니다. 길 없는 길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길을 밝혀줄 수 없습니다. 오직 자신만이 그 길을 찾아야 합니다.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한 삼보사찰 순례, 잘 연결됩니다.
글자님 덕분에 잊고 있던 계획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어쩌면 순례를 시작도 하지 못하거나, 중간에 포기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일단 계획이 살아났으니, 그 계획이라는 씨앗에 물을 뿌리고 토양을 잘 가꾸며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면 됩니다. 씨앗을 뿌린 것을 염원이라고 합니다. 마음에 서원을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삼보사찰 순례라는 염원을 지니고 걷고 또 걷겠습니다. 그 씨앗이 제가 살아있는 동안 거둘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며 누군가가 이어서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이마저도 아니면 저절로 사라질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씨앗은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루고 못 이루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종자를 심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길을 걸으며 길 없는 길을 걷겠다는 서원을 세워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