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하루

by 걷고

‘어느 하루’가 불현듯 찾아왔다. 다른 날과 전혀 다르지 않은 날인데, 매우 다르게 느껴진 하루, 어제다. 요즘 두어 달 특별한 일이 없는데도 몸도 마음도 분주하게 보냈다.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입 주변이 터져서 아내에게 구박을 받기도 했다. 2박 3일 간 남파랑길을 다녀온 후 갑자기 찾아온 여유, 마치 폭풍이 지난 후의 고요함 같은 어제였다. 특별한 이유도 없었다. 그냥 몸도 마음도 한가롭고 가볍고 편안한 하루였다.

오랫동안 불교 공부를 한 선배를 만나 귀한 책을 선물 받았다. 최근에 반야심경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좋은 책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그 선배는 절판이 된 좋은 책이 있다고 하며 그 책을 복사한 후 제본까지 해서 선물해 주었다. 귀한 인연을 만나 귀한 책을 선물 받고 귀한 법담을 나눴다. 경전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기에 그 선배는 말하고, 나는 들었다. 오랜만에 귀가 정갈하게 청소된 느낌이다. 그 선배와 헤어지면서 한 말이 있다. “점점 더 아는 것이 없어지고, 안다는 것이 제대로 아는 것인지에 대한 확신도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더욱 할 말이 없어진다.” 그 말을 들은 선배는 “그래서 부처님 말씀을 들어야 한다.”라고 하며 경전 공부를 하라고 격려해 주셨다. 귀한 인연에 감사를 드린다.


점심 식사를 같이 한 후 선배는 공부 모임으로 갔고, 나는 어슬렁거리며 인사동 거리를 걸었다.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며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다. 별로 관심 있는 것도 없다. 물건을 파는 사람과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에 나는 이방인이 되었다. 그렇다고 불편하거나 이질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들과 같은 세상을 살고 있지만, 그들과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 따름이다. 나는 군중 속 홀로 그들의 삶을 지켜보며 걷고 있었다. 마치 군중을 저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다. 거리감과 객관성이 섞인 느낌이랄까? 어린아이가 비둘기를 쫓아다니며 소리를 지르고 있고, 비둘기는 놀라 달아나고 있다. 괜히 웃음이 난다.


인사동 입구에 단돈 천 원에 아메리카노를 살 수 있는 테이크 아웃 전문점이 있다. 커피를 사서 부근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하늘도 쳐다보고, 지나가는 사람들 모습도 보고, 장사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지켜보았다. 한 20분 정도 아무 생각 없이 눈에 보이는 것을 그냥 바라보고 있었다. 특별히 볼 만한 것도 없는 것을 특별한 일이 없는 사람이 특별한 관심도 없이 그냥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전철을 타고 집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병원에 들렀다. 혈압은 75/115로 매우 안정적이다. 그렇지 않을 이유가 없다. 혈압약을 복용하고 있고, 2박 3일 간 행복하게 남파랑길을 걷고 왔는데 혈압이 높을 이유가 없다. 의사와 나는 단 1분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혈압 좋네요. 늘 드시던 약 처방할게요.” 처음 본 의사였다. 낯선 의사가 모니터를 보며 한 얘기였다. 그 기계적이고 짧은 대화가 오히려 편안했다.


처방받은 약을 구입한 후 불광천을 걸었다. 오후 네 시 정도였다. 딱히 집에 가도 할 일도 없고, 그 시간까지 걸은 걸음이 6,500보 정도였다. 1,500보만 더 걸으면 돈 100원을 버는데 굳이 걷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천천히 걸으며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는 사람도 쳐다보고 하늘도 쳐다보았다. 때마침 반가운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마치 구세주를 만난 느낌이다. 할 일 없는 백수에게 전화를 해 주는 고마운 친구가 있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이다. 그 친구와 통화를 하며 한껏 수다를 떨고 웃었다. 그 수다와 웃음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있다. ‘어느 하루’가 그렇게 편안하게 지나갔다. 그리고 그 ‘어느 하루’가 다시 그리워진다. 언젠가 다시 만날 ‘어느 하루’를 기대하며 오늘도 별일 없고, 할 일 없이 편안하고 가볍고 여유롭게 보내고 싶다. 그 '어느 하루'가 일상이 되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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