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어느 가수가 TV 방송에 나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는 그 이후에도 TV 방송에 출연해서 ABC 트레킹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을 자랑하며 자신이 이룬 것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보며 부러웠지만 그렇다고 ABC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 당시 내게 ABC는 그냥 남의 얘기일 뿐이었고, 나와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으로만 느껴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기억이 남아있는 것을 보니 어찌 보면 ABC 트레킹에 대한 씨를 이미 마음 밭에 뿌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2023년 여름 해파랑길을 걸으며 렛고님이 ABC 얘기를 꺼냈을 때에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듣고 흘려버렸다. 그리고 1년 이상이 지난 2024년 연말 걷기에서 본각 님이 다시 얘기를 꺼냈고, 걷자 님이 준비를 맡아주겠다고 했고, 함께 걸었던 길벗이 다 같이 가자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걷자 님이 검색을 통해 여러 여행사의 견적과 일정을 비교 분석한 후 한 곳으로 결정했다. 사전 모임과 두 번의 전지훈련을 마쳤고, 트레킹을 건강하고 즐겁게 하기 위한 준비를 각자 알아서 하고 있다.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멀게만 느껴졌던 시간이 흘러 드디어 13일 후에 출발한다. 지금 시계는 안나푸르나 트레킹 일정에 맞춰져 있다.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는 모르지만, 출발 일정이 기준이 되어 D-며칠로 날짜를 확인하고 있다. 머릿속은 온통 안나푸르나 생각으로 가득하다. 길과 트레킹에 대한 상상이 아니고,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다. 들고 갈 물건을 방바닥에 늘어놓고 매일 한두 번씩 바라보고 배낭에 넣고 빼기를 반복하고 있다. 코스는 이미 정해져 있고, 그 길을 따라 걸으면 되기에 굳이 검색하거나 더 이상 알아볼 필요가 없다. 사전 지식을 많이 알면 알수록 그만큼 길에 대한 기대감은 줄어든다. 숙소와 음식 걱정은 할 필요도 없고, 항공이나 이동을 위한 교통편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편안하고 다소 사치스러운 트레킹이다. 걷기 위해 필요한 개인 물품만 챙기면 되니 이보다 더 편안한 트레킹은 없다. 하지만 경험해 보지 못한 고산병은 신경이 많이 쓰인다.
준비물을 챙기며 문득 든 생각이 있다. 숙소가 준비되어 있고, 가이드와 트레킹족도 있고,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을 가는데 굳이 유난을 떨며 준비를 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날씨와 상황에 적합한 옷을 입고, 등산화를 신고, 고산병 대비를 위해 약을 먹으며 걸으면 되지 않을까? 필요한 물품은 현지에서 구입해도 될 것이고, 문제가 생기면 가이드와 동료, 주변 트레커들이 알아서 도와줄 것이고, 고산병으로 힘들면 굳이 ABC까지 가지 않고 아랫마을에 머물며 편안한 휴식을 취하면 되지 않을까? 트레킹 준비를 하며 너무 수선을 떠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불안감에 이것저것을 챙기고 있다.
마치 지구 원정대로 선발되어 미지의 세계를 탐험이라도 하듯 주변 사람들에게 ABC 트레킹을 간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나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가까운 지인들은 안전하게 다녀오라고 축하 인사를 하고 격려해 준다. 자신의 일이 아닌 남의 일을 축하해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다. 한 선배와 두 누이는 잘 다녀오라며 격려금도 보내주었다. 이번 트레킹을 하면서도 서로를 챙겨주며 즐겁고 안전하게 걷기를 기대해 본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걷거나 움직일 때 환자처럼 움직이라고 한다.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몸의 움직임에 대한 관찰을 놓치지 않도록 늘 마음챙김하라는 의미다. 고산병 예방을 위해서는 몸과 머리를 따뜻하게 하고 천천히 걸어야 한다고 들었다. 두 번의 전지훈련을 하며 천천히 걸으려고 했지만, 보속을 느리게 조절하는 것이 쉽지 않다. ABC 트레킹을 하면 힘이 들어 저절로 천천히 걷게 될 것이고, 그런 상황은 위빠사나 수행을 위한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의식적으로 천천히 움직이며 매 걸음에 마음챙김을 할 수 있다면, 또 마음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다면 이번 트레킹은 아주 좋은 수행의 장(場)이 될 수 있다. 사진을 찍는 것도 좋지만, 그 장면을 감상하며 시각 명상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아름답고 웅장한 자연과 자신이 하나가 되는 것도 좋은 명상법이다.
안나푸르나가 매력적으로 느껴진 이유는 부처님의 탄생지인 네팔이라는 나라와 네팔과 인도 접경지인 달람 살라에 달라이 라마가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번 트레킹은 단순한 트레킹이 아니라 순례이자 안거이다. 우리는 수행자이고, 출발이 안거의 결제이고, 코스 전체가 선불장(選佛場)이 되고, 함께 걷는 길벗과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상황은 도반이자 스승이 된다. 그리고 여정이 끝나는 날이 안거의 해제날이다. 이 안거 기간 동안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그 과정을 면밀히 관찰하고 마음챙김을 통해 마음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을 할 수 있다. 생각이나 감정이 과거나 미래를 방황하는 습관에서 벗어나 ‘지금-여기’를 참답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번 트레킹을 준비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졌다. 준비를 위해 애써 준 걷자 님, 일정을 준비해 준 어나집 여행사 대표님, 동참하지도 않으면서 격려금까지 기부해 준 길벗 범일님과 오공님께도 빚을 졌다. 안나푸르나 트레킹 기간 동안 우리를 위해 애써 줄 포터, 가이드, 요리사, 로지에서 근무하는 직원들, 트레킹 코스를 만들고 관리하는 사람들, 길 주변에서 장사를 하는 상인들 등 많은 사람에게도 빚을 지게 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 덕분에 안전하고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 또한 자연의 허락이 있어야만 이 길을 오를 수 있다. 비록 자신의 몸과 의지로 걷는 일이지만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며 저절로 겸손하게 된다. 이번 여정이 끝난 후 즉 안거 해제 후 속세에 돌아와 평온하게 살기 위해서 안거 기간 동안 수행자의 자세로 걷고, 만나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상황을 수용하며 걸어야 한다. 내가 안나푸르나를 걷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