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나레이 베이' (스포일러 포함)

by 걷고


상실의 슬픔은 크고 깊다. 특히나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은 그 고통을 가늠하기 어렵다. 아내는 장인어른께서 돌아가신 지 7년이 지났지만, 요즘도 가끔 장인어른 생각이 떠오른다고 눈물을 훔치곤 한다. 부엌 싱크대의 높이 조절과 칼과 가위가 무뎌졌을 때 갈아주셨던 추억, 좋아하셨던 음식들, 같이 갔던 장소들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영화 대사 ‘잊고 살지만, 영원히 잊히지 않는다.’는 말은 아주 정확한 표현이고, 상실을 겪어 본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살기 위해서 잊어야만 하지만, 또 살기 위해서 그런 추억이 있어야 하고 그 추억의 힘으로 살기도 한다. 기억에 남는 고인에 대한 모든 감정, 사고, 느낌 등은 좋고 나쁨과는 무관하게 고인을 떠오르게 하고, 희미한 기억조차도 붙잡고 싶어 질 때도 있다. 함께 살 때에는 그렇게 싫었던 상대방의 모습도, 고인이 된 후에는 좀 더 잘해주지 못했다는 후회와 아쉬움이 남는다고 한다.


남편은 마약중독으로 죽고, 아들은 서핑을 즐기다 상어에 물려 죽는다. 비록 그 내용은 다르지만 어찌 보면, 두 사람 모두 중독으로 인해 죽었다. 한 사람은 세상에 대한 원망과 절망감으로 마약 중독자가 되었고, 아들은 그런 양육환경에 대한 불만과 저항을 서핑이라는 건강한 중독에 빠져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불안감과 부모에 대한 원망을 풀어내고 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그 죽음의 방식이 다르더라도 결국 ‘죽음’은 ‘죽음’이다. ‘죽음’의 반대말은 ‘삶’이다. 죽음을 맞이한 주인공 ‘사치’는그 죽음에 힘들게 맞서 싸우며 ‘삶’을 살아간다. 두 사람 모두 ‘사치’ 에게는 쉽게 용서되지 않는 사람들이고, ‘사치’는 그들의 죽음에 마치 아무 감정도 없는 사람처럼 대하지만, 아들의 죽음을 통해 남편과 아들과의 기억들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사치’는 10년간 매년 아들의 목숨을 앗아간 하나레이 해변을 같은 시기에 찾아가 같은 곳에 앉아 책을 읽는다. 마치 바다에게 저항하듯 바다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겨루기를 하고 있다. 자연에 대한 저항인지, 아니면 그냥 그때쯤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서 방문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책을 보고 있는 ‘사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때마침 아들 같은 두 젊은 서퍼들이 그 해변에서 서핑을 즐기고 있고, ‘사치’는 서핑이 왜 좋은가라고 묻는다. 한 아이는 ‘인기가 올라가서’라고 아주 명쾌한 답변을 한다. 아마 ‘사치’는 그 아이들을 통해서 아들이 왜 서핑에 빠져들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설사 그 이유를 안다고 해도, 아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감정을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과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그렇게 10년을 보낸 시점에 그간 받기를 거부했던 아들의 ‘손도장 (finger printing)’을 받고 ‘사치’의 마음은 심하게 요동을 친다. 또한 외다리 서퍼를 봤다는 얘기를 듣고 그 서퍼를 찾기 위해 방황을 하기도 한다. 그런 과정에서 그간 억눌러왔던 아들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표출되며 서서히 마음을 열며 화해를 시작한다. 그간 갇혀있던 감정들을 눈물로 정화하며 남편, 아들, 원망했던 세상,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살아온 자신의 삶을 수용하기 시작한다. 나 역시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약 10년 만에 집단상담에 참가하여 눈물을 쏟으며 화해를 했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늘 타인으로만 느껴졌던 아버지 삶의 애환이 떠올라 연민의 마음이 올라오며 고인이 되신 아버지와 화해를 했었다. ‘사치’는 이제야 남편과 아들의 죽음, 자신을 받아들이며, 세상에 향해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손도장을 보관했던 부인은 ‘아들의 훈장과 아들의 손도장 중 어느 것이 더 의미가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 부인은 아들의 전사로 훈장을 받았다. 명예롭지만 차가운 훈장을 통해서 아들과 교감하기보다 ‘손도장’을 통해서 교감하기가 쉬울 것이다. 아들의 손도장에 자신의 손을 올리며 둘은 교감을 하고 따뜻한 체온을 느끼고 나눈다. 죽었지만 죽은 것이 아니다. 잊어야 하지만 영원히 잊히지 않는다. 또한 자신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가족과의 이별로 인한 상실감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점점 더 죽음을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상실은 반드시 죽음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퇴직, 이혼, 진급에서 누락, 입학시험에서 탈락, 취업이 안 되는 상황, 사업 실패, 질병 등 일상의 많은 상황에서 우리는 상실감을 느낀다. 또한 주변과의 비교를 통해서 상대적인 빈곤감과 상실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 상실은 우리에게 삶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멈추어 서서 삶을 바라보고, 미래를 향한 방향성을 정하라는 신이 주신 아주 소중한 선물이다. 상실을 통해서 우리는 성장하고 성숙해지며, 겸손해지고 좀 더 풍성한 삶을 맞이할 수 있다. 상실은 우리가 갖고 있었던 우리 것들을 앗아가는 것이 아니다. 원래부터 우리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만약 원하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면 그것은 애초부터 우리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도 ‘자신의 것’이 아니지 않은가?


경찰은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하나레이 해변과 하와이를 미워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사치’에게 정중하게 부탁을 한다.‘하나레이 해변’은 자연이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고,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간다. ‘사치’는 아들을 화장(火葬) 함으로써 자연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죽음은 자연으로의 회귀 즉,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 마치 혼백이 하늘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듯 해변, 산, 바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화면에 담아내고 있다.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며 자유를 얻은 것이다.


‘사치’는 아들과 같이 서핑을 했던 서퍼로부터 아들의 사진을 받고 자신의 삶으로 되돌아온다. 우연히 시내를 걷다가 해변에서 만났던 젊은 서퍼가 여자 친구와 함께 데이트하는 모습을 보고 다가간다. 그 서퍼는 대졸을 앞두고 있어서 취업 걱정을 한다. ‘사치’는 그 서퍼에게 아들의 사진을 보여준다. 모든 것이 제 자리로 돌아왔다. 서퍼는 삶의 현장으로, ‘사치’는 자신의 일상으로. 죽은 자는 그들이 머물 곳으로 가고, 산 자는 그들이 생활하는 곳으로 돌아갔다. 삶과 죽음은 그냥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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