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파랑길 나들이, 걷고 또 걷고

by 걷고

예전에 나들이님께 해파랑길을 걷자고 제안을 해서 회원 분들과 함께 걸었다. 하지만, 먼저 얘기를 꺼냈음에도 무책임하게 끝까지 함께 동참하지 못한 미안함이 크다.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중도하차를 하게 되어 나들이님과 길동무님들께 죄송했고, 스스로 많은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있었다.

이번에 나들이님께서 남파랑길을 기획하셨다. 약 1,400km에 달하는 이 코스를 완주하는데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중간에 많은 변수들이 있을 수도 있어서 2년, 3년 정도 걸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이상의 기간이 걸릴 수도 있다. 나들이님은 일단 시작을 하시면 끝을 보신다. 그분의 강한 의지와 실행력은 나의 나약한 결단력에 자극이 되기도 한다. 물론 끝까지 마무리를 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주변 환경의 영향도 있고, 특히나 그 변수가 아내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장인어른께서 돌아가신 후로 아내가 홀로 집에 있는 것을 불안해하고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늦게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아내는 해파랑길 걷는 것을 안 하면 좋겠다고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장모님께서 홀로 지내시며 잠을 설치시는 모습을 보며 아내도 혼자되는 것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내가 집에 없으면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내가 산티아고 길을 걸을 때 아내는 불안감에 잠을 못 이루고 힘들어했다는 사실을. 너무 미안했다. 아내의 말을 듣고 나들이님과 다른 분들에게는 죄송스러웠지만, 중도하차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당연히 그래야만 했다. 아내의 불안과 두려움을 무시하면서까지 걸어야 할 이유와 명분은 전혀 없었다.

남파랑 길을 걷고 싶다고 아내에게 얘기하면서도 마음속으로 걱정을 했는데, 아내의 대답은 내 예상대로였다. 결국 포기를 하였고, 이틀이 지났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무기력 상태에 빠진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심신의 솔직한 반응이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 몸과 마음은 걸으라고 계속적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삼일 째 되는 날 아내에게 나의 상황 얘기를 했다. 아내는 마지못해 동의를 했다. 길을 걸으면 아내가 불안해하고, 안 걸으면 내 심신이 무기력해지는 상태.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미안한 일이다. 그 사람이 아내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아내는 나의 무기력에 활력을 불어넣어주기 위해 자신의 불안을 스스로 안은 것이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아내에게 또 빚을 졌다. 평생 빚을 지고 살아왔는데, 또 빚을 진 것이다. 미안하다. 언제 그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을지 생각하면 막막하다. 하지만 그때 알았다. 내가 얼마나 걷기를 좋아하는지를. 산티아고 다녀온 후, 걷기에 대한 갈증이 조금 가신 듯했는데, 다시 갈증이 시작되었고, 몸이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의 몸과 마음은 끊임없이 내게 걸으라고 요구를 하고 있다. 그 갈증을 해결하지 못하는 한 어떤 즐거움과 활력을 느낄 수도 없다.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한 구석으로 밀어 넣으려 한다.

길을 걸으며 아내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즐겁게 걷고 걷는 일에 집중하며, 그 느낌을 글로 정리하여 한 권의 책을 아내에게 바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매일매일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고, 나의 길을 꾸준히 가는 것, 그것이 유일하게 아내의 희생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있다. 비겁한 변명이나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합리화일 수도 있다.

길을 걸으며 나는 성장하고 성숙해지고 변해갈 것이다. 자신과 타인에 대한 통합적인 사고를 확립하고 그런 관점으로 자신과 타인을 대할 수 있게 되길 내심 기대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힘든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자신의 벽을 허물고, 날카로운 부분을 잘라내는 성장통을 겪어내고 이겨내야 한다. 아직도 나 자신과 사람들에 대해 입체적인 사고를 갖지 못하고, 편견과 아집과 왜곡된 시각으로 보고 판단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응을 하고 있다. 이번 길에서는 나 자신의 일부를 잘라내고, 보완하고 다시 세우는 일을 하고 싶다.

이제야 길을 걷는 법을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지금까지는 힘든 상황을 극복하거나 건강상의 이유 거나, 아니면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걸었다. 목적을 위한 걷기였다. 하지만 이번 길은 그냥 걷는 과정을 즐기는 걷기를 하고 싶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 자신과 만나게 될 것이고, 성찰을 통해서 좀 더 성숙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걷기에 충실해야 한다. 변화를 위한 걷기가 아니라 걷기에 집중하면서 저절로 변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며칠 전 남파랑길 조성 및 홍보를 맡고 있는 순천의 한 사회적 기업에서 블로그를 보고 연락을 취해왔다. 지난번 나들이님이 부산 쪽 남파랑길 팸투어를 다녀오신 것과 같은 맥락인 것 같다. 앞으로 그 회사에서는 총 18개의 코스를 홍보할 계획이라고 하며 초대하겠다고 연락을 했다. 고마운 일이다. 꾸준히 걷고 블로그에 글을 쓴 것이 자연스럽게 이런 기회로 연결된 것이다. 팸투어에 초대받기 위해 걷거나 글을 쓴 것이 아니고, 꾸준히 걷고 글을 쓴 것이 전혀 예상치 못한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어쩌면 인생은 과정을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살고 있지만, 하나를 이루면 다른 목표가 생겨 다른 갈증이 생긴다. 어떤 경우에는 목표가 바로 눈앞에 있는 듯 보여도 잡으려 하면 저 멀리 뒤로 물러난다. 하지만 과정을 살다 보면 저절로 다가오는 것이 있다. 아마 그것이 인생일 것이다. 이번 남파랑길은 그냥 걸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환경에 따르며 걸을 것이다. 중도하차할 수도 있고, 완주할 수도 있고, 또는 다른 계획이 중간에 다시 만들어질 수도 있다. 어떤 것도 목표로 하지 않고, 하루하루 주어진 일을 하듯, 주어진 길을 걸을 것이다. 그러면서 주어진 인생을 받아들일 것이다.

좋은 자리 만들어주신 나들이님과 함께 걷는 길동무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나들이님도 프로젝트를 수행할 일이 생기셨다고 한다. 좋은 일이다. 일을 하면 일의 즐거움과 일 마친 후 휴식의 즐거움이 있다고 한다. 프로젝트 중간중간 시간이 허락할 때 길안내 역할을 하시며 같이 걸을 수 있다면, 그 즐거움은 배가 될 것이다. 모두 건강하고 즐겁게 걸으며 끝이 없는 길을 같이 걸어보자. 길 없는 길이 만들어질 것이다. 길은 걸으면 저절로 만들어진다. 길을 걷는 것이 아니고, 걸으면 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냥 이 순간을 걸어보자. 마치 주어진 삶을 하루하루 살다 보면 우리의 인생이 만들어지듯. 모든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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