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의 걷기 일기 0002]

거리두기

by 걷고

일시: 2019년 11월 23일

코스: 지리산 둘레길 동강 – 수철 구간

날씨: 영상 16도

거리: 13km

누적거리: 21km


오랜만에 지리산 둘레길을 걸었다. 이 길은 10여 년 전 길이 조성된 초창기에 총 5개 구간 중 3 개 구간을 2박 3일간 홀로 걸었던 적이 있다. 그때가 홀로 걷기의 시작이었다. 지금도 기억난다. 민박집의 정갈하고 푸짐한 식사와 홀로 지내는 내가 외로워 보였는지, 캔맥주와 안주를 방에 넣어주시며 편히 쉬라고 말씀하셨던 주인의 따뜻하고 넉넉한 인심. 그래서 이 길이 더욱 그리웠는지도 모르겠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잠시 옛 생각을 했다. 사업으로 힘든 시기를 보낼 때 지방에 있는 절에 찾아다니며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다. 버스가 서울 톨게이트를 통과하여 외곽으로 나가면 가슴 통증은 거짓말같이 사라졌고, 귀경 길에 버스가 톨게이트를 통과해서 서울에 진입하면 통증이 다시 시작되었다. 어제 버스 안에서 그 생각이 떠오르며, 지금은 마음이 많이 편해진 것을 느끼며 홀로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각자 온 사람, 친구들과 온 사람, 오랫동안 같이 걸었던 동호회 회원 등 각각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내 옆자리에 한 여성이 앉게 되었다. 서로 낯선 사이라 어색함이 흘렀다. 좁은 버스 좌석에 낯선 남녀 둘이 같이 앉아 있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다행스럽게 이 버스의 좌석은 통로 쪽 의자를 통로 쪽으로 5cm 정도 이격 시킬 수 있는 장치가 있었다. 나는 창가에 앉아 있었고, 그 여성은 통로 쪽에 앉아있었는데, 자신의 좌석을 통로 쪽으로 이격 시켰다. 서로 움직임이 조금 편해진 느낌이 든다.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은 서로에게 편안함을 준다.


동강에 도착해서 걷기 시작했다. 하늘이 청명하다. 구름을 하늘에 빗자루로 쓸어낸 느낌이 든다. 오늘은 자꾸 하늘을 바라보게 된다. 걷기에 아주 적합한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와 맑고 푸른 하늘을 보니 가슴이 시원해진다. 하늘을 바라보며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네 명의 어르신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모여서 누군가가 찍어주길 기다리고 있는 눈치여서 찍어 드렸다. 평상시 같으면 얘기도 걸고 재미있는 포즈를 취하라고 너스레를 떨었는데, 오늘은 그러기가 싫어서 사진만 찍어주고 무심한 듯 돌아섰다. 오늘은 누구에게도 신경 쓰고 싶지도 않고, 간섭을 받고 싶지도 않다. 군중 속에서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래서 이런 이동 수단과 길 안내를 제공하는 군중 속 홀로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 하나로 자유를 느낄 수 있다. ‘군중 속 고독’은 오히려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 홀로 걷는 길이 결코 외롭지 않고, 누군가의 간섭도 없고 아무 말도 할 필요도 없이 자신과 대화를 하거나 자연을 즐기며 걸을 수 있다. 가을 낙엽을 밞으며, 하늘을 쳐다보며, 자연의 냄새를 맡으며, 나무와 산도 보고 계곡물소리도 들으며 홀로 걷는 마음이 한가롭고 편안하다. 홀로 걸으니 속도를 조절하며 가능하면 다른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걷는다. 앞에 사람들이 가면 속도를 내서 빨리 앞서 가거나, 아니면 천천히 걸으며 뒤로 처져서 홀로 걷기에 방해를 받지 않도록 조절하며 걷는다. 걸을 때에도 사람들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게 되면 한가로운 걸음을 할 수 있다. 같이 걷는 사람들도 서로 거리를 유지하면 편안한 걸음을 할 수 있다.


하루 종일 한 얘기라고는 “음식 좀 맛보시죠?”, “걷기에 참 좋은 날이죠?”, “다음에 봬요.” 등 몇 마디가 전부이다. 그런데도 심심하지 않다. 옆 좌석 여성과도 굳이 얘기를 하지 않아도 서 너 시간의 이동시간이 전혀 불편하지 않다.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를 어느 정도 유지하면 서로가 편안하다. 서울에 도착해서 우연히 그 여성과 같은 지하철을 타게 되었다. “댁이 어디세요? 저는 증산동입니다.” “조심해 들어가세요” 그리고 다른 칸으로 옮겨갔다. 그래도 편안하다. 가족을 포함해서 사람 간의 관계이든, 일과 자신과의 관계이든, 자신과 상황과의 관계이든,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거리 두기’는 삶에 여유로운 공간과 충만함을 준다. 오늘은 그런 충만함을 느낀 날이다.

1574509188955.jpg


이전 02화[걷고의 걷기 일기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