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사람, 삶 (해파랑길 5회 차)

양포항에서 호미곶 (20180421-20180423)

by 걷고

3일간 걷기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첫날은 양포항에서 구룡포까지 걸었습니다. 햇빛이 강하긴 했지만 바닷바람이 시원해서 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해안가를 따라 걷는 길에서 여러 가지의 길을 만났습니다. 포장된 도로, 해안가의 모래길과 자갈길, 흙길 등 다양한 길을 걸었습니다. 길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길을 가는 것입니다. 길을 걷다가 길이 끊기거나 보이지 않으면 잠시 다른 길로 접어들며 방향을 보고 걷습니다. 갈 곳이 정해져 있고 그 방향을 알고 있으니 그쪽으로 묵묵히 가기만 하면 됩니다.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원하는 곳에 도착하게 되어 있습니다.

둘째 날은 구룡포에서 호미곶을 향해 걸었습니다. 첫날과는 달리 바닷바람이 강하고 구름이 많이 끼어 약간 쌀쌀한 날씨였습니다. 옷을 끼여 입고, 장갑도 챙기며 추위에 대비를 하고 걸었습니다. 첫날과 달리 이 날은 지치고 생각이 많아서 그런지 모두 일렬종대로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각자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무게를 어떻게 잘 견디며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모습이 처량하게 보이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보였습니다. 삶의 무게를 누군가에게 넘기지 않고, 자신의 두 발과 온몸으로 온전히 받아내며 걷는 당당함이 배어있었습니다. 잠시 쉬고 차 한 잔 마시기 위해 카페에 들렸습니다. 카페 안에서 서로 얘기를 하기보다는 각자의 핸드폰에 뭔가를 기록하고 연락을 하기도 하며 자신만의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하여 일행은 포항 죽도시장에 가서 오랜만에 맛 집 여행을 하는 느낌으로 회와 홍게를 푸짐하게 먹는 호사를 누리기도 하였습니다.


셋째 날은 다른 회원 분들을 어제 보내 드리고, 세 명의 남성, 나들이님, 도니 님 그리고 저, 이 빗속을 뚫고 청송 감사둘레길과 영일대호텔 주변을 걸었고, 근처의 폐선이 된 철도 공원을 걸었습니다. 그 공원에는 ‘불의 정원’이 있었습니다. 천연가스 불길을 그대로 모든 사람들이 지켜볼 수 있도록 공원 내 설치한 시설물입니다. 그 불길은 포항제철의 끝나지 않는 열정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그 불길을 굳이 사진에 담은 이유는 아마도 제 마음속에도 삶에 대한 열정이 계속되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길동무들과 함께 걸으며 대화의 즐거움도 있지만, 서로의 삶을 통해 배우기도 하고 길동무가 자신의 거울이 되어 나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이번 여행을 백미는 ‘걸었던 길’보다도 길동무들이 살아온 각자 ‘삶의 길’을 들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공고를 졸업한 후 대학 입학 시까지 10년의 세월이 걸렸고, 다시 대학원 입학까지 10년의 세월을 지나면서도 자신의 꿈을 실현하셨던 나들이님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아버님을 여의고 장남으로 어머니와 함께 살아온 그분의 삶은 아마도 어느 누구보다도 치열했을 겁니다. 외아들이 병상에 누워있어서 그 무게를 견디기 위해 걷고 있는 안개님을 보며 어머니의 강인함과 애틋함, 두려움과 불안함을 보았습니다. 그 무게가 견디기 힘들 만큼 무거웠지만 묵묵히 견뎌내며 걷고 계셨습니다. 걷기를 시작하며 자신의 모난 모습을 보았고, 사람들과의 갈등 해결을 위해 법륜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언젠가는 템플스테이도 해 보고 싶다고 생키미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에게 걷기는 단순한 걷기가 아니고 살아있는 ‘인생 학교’입니다. 우울증 극복을 위해 걷기를 시작하신 초록님의 담담한 얘기를 들으며 그분의 길에 대한 열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업에서 퇴임할 시점에 부친께서 돌아가셨고, 그런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길을 걷고 있는 도니 님의 얘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모두 각자의 삶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묵묵히 살아가고 계셨습니다. 저 역시 최근에 심혈을 기울였던 시험에 실패하고 나서 며칠간 힘든 몸살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번 길에 제게는 아주 시기적절한 좋은 길이었습니다. 늘 휘파람을 불고 다녔는데, 불합격 발표 이후에는 저절로 사라졌었고, 이번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휘파람을 불을 수 있었습니다.


이번 길은 제게는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다른 분들의 살아오신 말씀을 들으며 사람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간 저는 저의 기준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번 길을 통해서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해를 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우리가 내리는 판단은 자신의 기준과 경험에 의한 것이기에, 결코 다른 누구에게도 적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언행도 각자에게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비록 자신의 언행에 대한 이유를 스스로 모를 경우에도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모든 존재는 생존이 가장 중요하기에 그 생존을 위한 판단과 결정을 하고, 그에 맞는 언행을 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 모습이 다르고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당사자는 그런 시선을 가진 분들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더욱더 우리는 타인에 대한 판단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이해를 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그대로 지켜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을 겁니다.


불합격으로 힘들어할 때, 한 친구가 제게 ‘거울’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거울’은 단지 비치는 모습만 비치어냅니다. 그 모습이 거울로부터 사라지면 비추어졌던 형상도 사라집니다. 모든 것, 사물, 감정, 생각, 분노, 어떤 대상이든 우리 마음속에 잠시 멈추어 있다가 사라지는데, 우리는 그 모습을 잡으려고, 또는 뿌리치려 안간힘을 쓰고 그로 인해 많이 괴로워합니다. 그냥 그대로 바라 볼뿐입니다. 그리고 늘 하듯이 그냥 주어진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아마 그것이 우리네 삶인 것 같습니다. 불합격의 아픔도 흘려보내고 각자 힘든 짐도 그대로 짊어진 상태에서 그냥 오늘을 살뿐입니다. 사람과 상황들에 대한 모든 판단과 감정도 내려놓고 매 순간 주어진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갈 뿐입니다. 우리가 걷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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