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시비의 기준을 정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또는 자신을 스스로 살펴볼 경우에도 그렇다. 어떤 언행이 바르고 그른지, 또는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바른 선택인지 그 기준이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이 있다. 가끔은 누군가가 판단을 내려주길 기대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의견과 경험을 얘기하는 것에 그치기도 하고, 또는 의견을 강요하는 경우도 있어서 결국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조언을 받아 도움 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그런 기회는 자연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서로의 삶에 대한 존중과 배려로 인해, 또는 타인의 삶에 굳이 끼어들고 싶지 않아 아주 특별한 경우 외에는 타인의 삶에 대해 조언이나 충고하기를 꺼리게 된다.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가 쓴 ‘도덕 감정론’을 현대인이 알기 쉽게 정리해 놓은 책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을 최근에 읽었다. 250년 전에 쓰인 책인데도 그 책의 메시지는 현재 우리의 삶에 한치도 어긋나지 않게 적용된다. 고전이 고전인 이유는 오랫동안 읽혀왔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꾸준히 읽었다는 얘기고, 또한 그럴 가치가 있다는 얘기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이 변화해도 우리네 삶의 태도와 모습은 시대와 상관없이 큰 변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이유로 고전이 꾸준히 읽히고 있고 고전을 통해 삶의 지혜를 배우고 있다. 이 책은 내게 삶의 기준을 만들어 준 소중한 책이다. 또한 행복의 정의는 무엇이며, 어떻게 행복을 구할 수 있으며,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인지 우리에게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다.
저자는 ‘공정한 관찰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시비의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하였다.
“누구나 마음속에 공정한 관찰자가 있다. 나의 행동이 옳은지 공정하게 알려주는 가상의 인물이다. 공정한 관찰자 덕분에 우리는 한걸음 물러서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본문 중)
‘공정한 관찰자’는 ‘양심’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조금 다른 느낌이 든다. ‘양심’이라고 하면 사람에 따라 양심의 기준이 다를 수도 있고, 필요에 의해서 또는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양심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양심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자기 것’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공정한 관찰자’는 자신의 내부에 있지만 마치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외부의 인물이 냉철하고 감정과 이기심을 완벽하게 배제한 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내 안에 있지만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이다. 대외적으로 명분 있는 언행을 한다는 사람들도 ‘공정한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면 결국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려는 이기적인 인간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삶의 기준을 정하거나 중요한 선택을 할 때 ‘공정한 관찰자’의 입장에서 볼 수 있다면, 크게 어긋날 일은 없을 것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그 관찰자 앞에서 떳떳하고 당당해야 한다.
“언제나 공정한 관찰자가 우리를 지켜보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공정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인식해야 한다.” (본문 중)
또 다른 행복의 조건으로 저자는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
“인간의 삶이 비참하고 혼란스러운 가장 큰 이유는 소유물이 곧 나 자신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본문 중)
소유물로 자신을 동일시하는 한 우리는 행복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이룬 성공과 그로 인한 물질적 보상으로 행복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물론 경제적으로 너무나 어렵다면 행복하거나 삶의 질이 좋아질 수는 없지만, 소유물이 바로 자신이라는 생각은 아주 위험한 생각이다. 요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갑질’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정당한 방법으로 성공을 이룬 분들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성취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고 엄청난 노력을 해왔기에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 하지만 소유물은 노력의 부산물일 뿐이다. 그 성공의 보상물을 자신으로 생각하게 되면 소유물이 자신을 소유하게 된다.
저자는 행복의 조건을 ‘사랑받을 존재’라고 하였다. 우리의 언행과 이뤄낸 성취를 다른 사람들이 존중하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사랑받을 존재가 될 수 있다. 그 반대의 경우에는 많은 것을 이루었어도 사회적으로 지탄받고 사람들에게 존중 대신 비난을, 사랑 대신 미움을 받게 된다.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하고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진정 행복을 느낀다. 반대로 내가 미움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깊은 불행을 느낀다.” (본문 중)
겉으로 드러나는 사실과 실제와는 거리가 있을 수도 있다. 겉으로 아름다운 일을 했어도, 그 일 자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떳떳하지 못하다면 자신의 내부에 상존하는 ‘공정한 관찰자’의 사랑을 받을 수가 없고, 그로 인해 충만한 행복감을 느낄 수가 없다. 그런 면에서 ‘공정한 관찰자’는 일상 속에서 삶의 균형을 잡아주는 아주 중요하고 고마운 존재이다. 저자가 얘기한 ‘사랑받을 존재’가 되는 방법은 아주 쉽고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제악막작 중선봉행 (諸惡莫作 衆善奉行)이다. 모든 악함을 짓지 말고 여러 선함을 받들어 행하라는 말씀이다. 이미 모두 알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지만, 실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또 한 가지 아주 중요한 것은 나쁜 일과 착한 일의 기준은 냉철한 ‘공정한 관찰자’의 기준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행복하기 위한 마지막 조건으로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 만족을 얘기하고 있다.
“가능하면 내가 좋아하고 존중하는 일을 하고, 그렇게 일해서 가족이 먹고살 수 있다면, 그것에 만족하라. 그 외의 모든 것은 ‘뜻밖에 얻은 횡재’라 생각하라.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다.” (본문 중)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공정한 관찰자’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바른 노력으로 얻은 성취는 ‘공정한 관찰자’의 지지를 받기에 충만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고,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 행복은 더욱 커지게 된다. 250년 전에 쓰인 책을 통해 삶의 기준인 ‘공정한 관찰자’를 알게 되었다. 애매모호한 기준에서 좀 더 확고한 기준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삶은 대부분 소박하고 단순한 삶이다. 저자는 “재산이나 명예, 권력을 통해 세인의 관심을 추구하는 대신, 지혜롭고 선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결론 맺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