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처음 만난 것은 2012년 여름 걷기 동호회인 ‘걷기 마당’에서 첫걸음을 한 날이었다. 길 안내를 맡은 그를 따라 안국역에서 삼청공원을 걸었던 기억이 난다. 서울 구석구석 골목길을 마치 손금 보듯 거침없이 걸으며 길 안내하는 모습이 신기했고, 서울에 그렇게 걸을 만한 길이 많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동호회에서 꾸준히 활동하며 그의 길을 따라 걷고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건축사로 지금도 공사 현장에서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투철한 직업 정신 때문인지 사소한 실수나 오차를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느껴진다. 일산역에서 오전 10시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9시 47분에 도착한다는 카톡을 보내왔고, 역사 내에 위치한 커피숍 사진을 보내주며 정확한 장소를 확인하기도 했다. 언제 어느 곳을 가든, 반드시 사진과 기록을 남기는 것이 몸에 밴 사람이기에 그 커피숍 사진도 아마 예전에 찍어 둔 사진이었을 것이다. 그날은 그가 오후 12시 30분부터 고봉산, 탄현 공원, 황룡산, 운정 호수 공원을 안내하는 날이어서 사전에 만나 인터뷰를 한 후에 같이 걷기로 했다. 현재 지방 공사 현장에서 현장소장으로 근무하므로 주말에만 서울에 올라오기에 따로 시간을 내어 만나기가 쉽지 않아 걷기 전에 만나기로 약속한 것이다.
- 언제부터 걸었고, 걷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
“2010년쯤 아내의 등쌀에 못 이겨 건강검진을 삼성 제일병원에서 받았는데, 최고혈압이 270으로 다른 검진을 진행할 수 없는 상태였다. 3일간 입원하여 정밀 검사를 받았는데도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했다. 혈압이 그렇게 높다는 것조차도 인식하지 못하고 일에 매달려 바쁘게 지낸 시기였다. 가족을 위해서라도 건강에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교회 친구들과 함께 등산을 시작했는데, 몇 걸음 가지 못해 힘들어하며 쉬곤 해서 민폐 끼치기 싫어 걷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 그 이유가 무엇인 것 같은가? 무슨 일이 있었는가?
“직원 10여 명을 두고 건축사 사무실을 10여 년 운영했다. 수주하고 공사 진행하느라 바빠 내부 관리를 소홀했는지 직원들에게 금전적인 손해를 당했다. 또한 믿었던 친척들을 위해 보증해 준 것이 문제 되어 경제적으로 힘들었다. 경제적인 손실도 괴로웠지만, 믿었던 사람들에 대한 실망감, 배신감, 분노로 인해 더욱 힘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무능력과 사회적 관계의 미숙함에 대해 자신 탓을 하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착하게 살아왔는데, 그렇게 살면 결과적으로 손해 본다는 생각이 들어 억울하기도 했다.”
걷기 동호회 ‘걷기 마당’에서 그는 ‘나들이’라는 별칭을 사용하고 있다. 동호회에서는 모든 회원들에게 본명 대신 별칭 사용을 권하고 있다. 사회적 위치, 나이, 성별, 경력 등과 관계없이 길 위에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는 원칙하에 서로에게 000님이라고 부른다. 또한 본명, 직업, 나이, 결혼 여부, 기타 개인적인 질문은 하지 않고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존중하며 걷고 있다.
- 별칭을 ‘나들이’로 정한 특별한 이유는?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을 좋아한다. 그 시에 ‘소풍’이 나오는데, 그 시를 보며 인생은 나들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들이’로 정했다.”
‘귀천’을 찾아보았다. 인생을 ‘소풍’으로 비유하고, 잠시 다녀가는 소풍 같은 삶에 미련과 집착을 버리고 무욕의 삶을 살고 싶다는 삶의 태도를 담백하게 표현한 내용이다.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 더불어 손에 손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귀천, 천상병)
- 걷기를 통해서 무엇을 얻었는가? 어떤 좋은 점이 있는가?
“ 우선적으로 건강이 좋아졌다. 아침에 기상하면 몸이 개운하고 상쾌하다. 잡생각을 덜 하게 되고 생각도 정리된다. 홀로 걸으며 길을 찾아내거나 걷기 코스를 구상하면 과거의 상처들과 괴로운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런 방법을 통해서 상처를 새로운 도전으로 변환시킨다. 그 결과 스스로 들볶는 것이 많이 줄어들었고 마음도 편해지기 시작했다. 또한 걸으면 생각이 정리되어 행복해진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도 많이 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해도 ‘그러려니’,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며 상대방 입장에서 보려고 노력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요즘에는 남 탓하기보다는 오히려 양보하고, 나와 다른 의견과 생각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앞으로의 계획은?
“서울 둘레길, 한강변 걷기, 그 외에 많은 길을 찾아 홀로 걷거나 함께 걸었다. 2017년 말부터 걷기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총 770km에 달하는 해파랑길을 걷기 시작하여 2019년 5월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2019년 6월부터 남파랑길을 걷기 시작하여 아직 진행 중이다. 남파랑길은 부산 오륙도에서 전남 해남 땅끝 마을까지 이어지는 1,463km에 달하는 남해 둘레길로 2020년 12월에 마칠 계획이다. 2021년 1월부터 서해안길 1,804km를 준비하고 있고, 그 이후에는 DMZ 평화누리길을 걸을 계획이다. 2023년 하반기 경 코리아 둘레길을 모두 마칠 수 있을 것 같다.”
삼면의 해안 도로와 DMZ 평화누리길을 잇는 4,500km에 달하는 코리아 둘레길을 정부에서 조성 중이다. 아마 그가 이 길을 모두 걸은 첫 번째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해파랑길을 같이 걷자고 먼저 제안했으면서도 개인적인 이유로 중도 하차한 점에 대해 그에게 늘 큰 빚을 지고 있는 나는 남아있는 남파랑길부터 함께 걸으려고 마음을 다지고 있다. 코리아 둘레길을 모두 마친 후의 계획이 궁금했다.
“해외 트레킹은 생각하고 있지 않다. 국내 좋은 길이 너무나 많다. 내륙에 조성된 길과, 앞으로 조성될 길을 걸을 계획이다. 지리산 둘레길도 있고, 소백산 둘레길도 있고, 앞으로도 이런 길은 계속해서 조성될 것이다. 그 길을 계속해서 걷고 싶다.”
- 지금까지 걸으면서 가장 좋은 길은 어디인가? 추천할 만한 곳은?
“어느 길이나 길은 모두 좋다. 같은 길도 걸을 때마다, 계절마다, 또 누구와 함께 걷느냐에 따라 다른 길이 되기도 한다. 좋지 않은 길은 없다. 굳이 얘기하자면 해파랑길이 인상에 많이 남는다. 시원한 바다를 보며 걸으면 마음이 시원해진다.”
- 걷기 동호회인 ‘걷기 마당’에서 카페 매니저도 하고, 길 안내를 꾸준히 맡고 있는데?
“걷기 동호회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받았고, 그 고마움을 환원하고 싶어서 길 안내를 하고 있다. 하지만 가끔은 회원들에게 오해를 받기도 한다. 카페 매니저로 활동하고 또 길 안내하며 회원들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기가 쉽지 않다. 백인백색이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카페의 취지에 어긋난 언행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때마다 운영진의 일원으로 나서서 의견을 제시하다 보니 가끔은 오해나 비난을 받기도 한다. 카페에 대한 열정이 많아서인지 모르겠지만 카페나 운영진에 대해 공격하거나 불만을 얘기하면 마치 내가 공격이나 비난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나 스스로 가끔은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동호회 활동을 하며 많은 사람들의 얘기를 듣게 된다. 그에 대한 얘기도 많이 들었고, 그의 얘기도 많이 들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걷기와 카페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어느 누구보다도 깊다는 것이다. 가끔은 그의 강한 어조가 불편하게 느껴진 적도 있었고, 의견차로 인해 불편한 관계가 된 적도 있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생각과 감정은 그 사람의 일부분이지 그 사람 자체는 아니라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상대방을 적대적으로 대하고, 비난하거나 폄하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한다.
그에게 걷기란 무엇일까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길을 단순히 걷는 것이 아니고, 마치 고시 공부하듯이 길을 탐구하고, 교통편과 숙소를 알아보고, 길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도 사전에 공부하여 알려주는 그에게 과연 걷기란 무엇일까? 왜 그렇게 많이 걷고, 길을 찾기 위해 애쓸까? 걸으면서 또 다른 길을 준비하고 있는 그를 보며 히딩크 감독의 말이 떠올랐다. “I’m still hungry!!” 그렇다!! 그는 늘 길이 고프다. 걸어도 걸어도 길에 대한 허기가 채워지지 않는다. 길을 걸으며 동시에 길이 고픈 사람이다.
“걷기란 호흡이다. 한 호흡 들이마시고, 내쉬지 않으면 죽게 된다. 내게 걷기란 바로 생명, 생존과 같은 호흡이다. 호흡 못하면 죽듯이 걷지 못하면 죽을 것 같다.”
그의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에게 걷기란 바로 생존을 위한 수단이다. 삶의 활력이나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닌 유일한 삶의 출구이며 분출구이다. 일찍 아버님을 여의고 어린 가장으로 많은 일을 겪고 견디며 힘들게 살아온 그는 매 순간을 마치 외줄 타는 느낌으로 살아왔을 것이다. 잠시라도 방심하거나 사소한 실수라도 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바로 걷기였을 것이다.
걷기를 통해 생존의 방편이 삶의 활력으로, 괴로움이 즐거움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에서 벗어나 화해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역지사지를 알게 되었고, 자신의 경험과 사고를 바탕으로 타인에 대한 이해심을 키우며, 자신의 벽을 허물고 외부와 소통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자신과 자신이 하는 일, 생각, 소속된 조직이 하나라는 동일시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는 상처에서 생살이 돋아나서 웬만한 상처 정도는 쉽게 치유하고 상처 받지 않을 수 있다고 얘기하지만,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걷기 동호회에서 또다시 사람들로 인해 상처를 받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무엇을 하며 살고 싶은지 물어보았다.
“걷기에 대한 변함없는 열정으로 살아갈 것이고, 길 위에서 대미를 장식한다는 염원을 지니고 있다. 꾸준히 테마 별 길을 탐구하고, 걷기마당에 적합한 걷기 루트를 개발하고, 길 위에 녹아있는 역사적 의미를 공부하며,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공유할 것이다.”
특별한 계획이나 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소풍 가듯 가볍고 즐겁게 길을 걸으며 삶을 나들이하듯 살고 싶다고 한다. 그가 길을 찾고 걷는 모습을 보며 ‘고산자 김정호’가 생각난다. ‘걷기의 달인’이자 현대판 ‘고산자’인 ‘나들이’의 코리아 둘레길 완주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