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에게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은 모두 자신 내부의 감정이나 생각이므로 상대방 탓을 하지 말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대인관계에서 갈등의 대부분은 상대방에 대한 잘못된 감정과 생각으로 인해 발생한다. 서로 털어놓고 얘기하면 같은 상황에서 서로 다른 생각과 의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확인되지 않은 상대방의 생각, 감정, 행동, 느낌을 스스로 만들고, 붙들고 씨름하며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 이 경우 대부분은 상대방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발생하여 자신을 갉아먹게 된다. 상대방에게 느껴지는 감정이나, 상황 속에서 해석되는 모든 내용은 자기 내면의 감정이나 생각의 산물에 불과하다.
동호회 모임의 주요 내용을 공유하는 밴드가 있다. 이런 밴드를 통해 각자 의견을 편하게 제시하기도 하고, 의견이 분분한 경우 투표 방식을 통해 결정하기도 하는 아주 편리한 방편이다. 핸드폰 자판의 글을 통해 의견을 나누지만, 그 글 속에서도 감정을 느낄 수가 있다.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감정을 느끼는 것과 같다. 글은 그 자체로 힘과 감정을 지니고 있다. 밴드를 통해 의사 표현할 경우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 시큰둥하거나 댓 글이 없으면 은근히 신경이 쓰이기도 한다.
그 밴드방에 글을 올리거나 의견을 표현하면 언젠가부터 한 두 명은 아예 무시하는 듯한 태도로 댓 글을 달지 않거나 또는 아주 간단하게 ‘예’ 정도로만 표현을 한다. 은근히 기분이 나쁘다. 그중 한 사람은 특히 그 경우가 심해서 혹시 그 사람이 나에게 삐쳐있거나 아니면 나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고민하기도 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불편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경우이다. 상대방의 의도와 상관없이 괜히 나를 멀리하거나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나 역시 기분이 나빠지고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반응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기도 한다.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이다.
얼마 전에 읽었던 켄 윌버의 책 ‘무경계’에서 그 답을 찾았다. 투사(投射)였다.
“투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 부근에는 일종의 저항감이 숨어있다. 즉, 우리가 싫어하는 다른 사람들의 일면은 단지 우리가 우리의 내면에서 은밀히 싫어하고 있는 일면일 뿐이라는 진실”
(‘무경계’ 본문 중에서)
‘투사(投射)’는 자신의 성격, 감정, 행동 따위를 납득할 수 없거나 자신이 지닌 욕구를 인정하고 싶지 않을 때 그것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방어기제이다. 자신이 감추고 싶어 하는 자신의 못난 모습이나 욕구를 상대방에게 전가하여 자신의 부정적인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에게 느껴지는 모든 감정이나 생각은 실제로는 자신의 것들이다. 상대방이 나를 미워하고 있다는 생각은 내가 그를 미워하고 있는 것이다.
밴드방에서 느꼈던 감정과 생각들을 돌이켜보았다. 과연 나는 그 사람에게 어떻게 대하고 있었는가? 그가 나를 무시하거나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기보다 내가 은근히 그를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 교묘히 그에게 투영시켜 내게 다시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내 마음의 그림자가 상대방이라는 거울을 통해 다시 내게 비치는 것도 모르고, 상대방이 내게 화를 내거나, 무시하거나, 삐쳐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괜한 오해로 미워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지녔던 것에 대해 그분에게 미안했다.
어제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 서 있었다. 내가 타려고 하는 버스는 앞에 정차한 버스로 인해 조금 뒤에 정차해 있어서 뛰어갔더니, 기사님이 손짓으로 앞으로 가라며 버스를 서서히 전진시켰다. 순간 기분이 나빠지려고 했다. 기사가 손짓을 하는 모습이 마치 나를 무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순간 ‘투사’가 떠올랐다. 상대방에게 느껴지는 모든 감정과 생각은 나의 감정과 생각이다. 기사님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인데, 내가 원하는 대로 따라 주지 않았다고 기사님을 무시하고 화를 내려고 했던 것이다. 기사님에게 미안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슬며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늘 고민해왔던 숙제 중 하나인 ‘대인관계의 불편함’을 투사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풀어낼 수 있다는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다.
상대방에게, 또는 어떤 상황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 감정, 느낌이 드는 순간이 바로 마음공부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시점이다. 그런 이유로 인해 자신 속에 부정적인 감정이 있을 때에는 모든 결정을 유보하라는 말도 있다. 그런 결정은 대부분 후회를 남기게 되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감정에 빠져서 내린 결정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그런 시점에 바로 ‘투사’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마음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행동이나 결정도 내리지 않고 비판단적인 태도로 가만히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는 것이다. 한 차례의 폭풍과 먹구름이 지나가면 평온하고 아름다운 하늘과 세상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외부의 자극에 대해 무의식적인 자동 반응을 하게 된다. 이것을 ‘자동적 사고’라고 한다. ‘투사’를 통해 자신의 저항감을 알아차리고, 그 저항에 습관적이고 자동적인 반응을 하지 않는 연습을 통해서 긍정적인 마음 근육을 키울 수 있다. ‘투사’는 아주 좋은 마음공부의 방편이다. 마치 거친 강을 건널 때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 뗏목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