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은 추억이다
코스: 20200531 서울 둘레길 (증산역 – 봉산 – 앵봉산 - 구파발역 10km)
누적거리: 1,044km
평균 속도: 3.3 km/h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어제 아침에 손녀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약 9개월간 우리 집에서 잘 지내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어린이집에 가기 위해 떠났다. 시원섭섭하다는 말이 나온 이유를 알겠다. 같이 있으면서 피곤한 적도 있었지만, 벌써 추억이 되어버렸다. 그간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어서 다행스럽고 고마웠다. 지난주 금요일 저녁에 손녀 두 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집에서 간단한 파티를 준비했다. 벌써 두 돌이 지났다.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보다 많이 자랐다. 말도 제법 한다. 처음에는 한 글자를 얘기하다, 지금은 서너 글자로 문장을 만들기도 한다. 물론 아는 단어는 제한적이고 발음도 어설프지만, 서로 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신기한 일이다. 말이 잘 통하지도 않는데 소통이 가능하다. 일상 속에서 성인들의 대화는 서로 말은 잘 하지만 소통이 잘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손녀가 가버린 집은 절간처럼 조용하고 집안이 넓어진 느낌이 든다. 손녀 물건 중 일부를 들고 가서 그런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작은방에 들어가 명상을 하려고 앉았는데, 손녀가 가지고 놀던 고무공이 보인다. 갑자기 손녀가 보고 싶어졌다.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고무공을 보니 손녀 생각이 난다. 옆집에서 아이 우는소리가 들리면 손녀가 그립다. 아내는 손녀 때문에 지저분해진 식탁을 닦으면서도 손녀 얘기를 하며 웃기도 한다. 9개월은 우리 인생에 다시 올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런 추억과 시간을 함께 공유했던 내용을 평생 두고두고 손녀와 얘기하게 될 것이다. 부디 건강하기만을 바란다.
공을 보며 손녀가 떠오르며 사위와 딸이 떠오른다. 딸은 우리 집에서 손녀와 함께 머물다 금요일 저녁에 손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주말을 사위와 함께 보내고, 일요일 저녁에 우리 집으로 왔다. 이런 일을 9개월간 반복한 것이다. 아이들도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젊은 부부가 같은 서울 하늘 아래에 살면서 주말부부로 산다는 것이 늘 마음이 짠했다. 애들이 자기들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이해하면서도 많이 불편했을 것이다.
냉장고와 세탁기가 얼마 전에 새로 들어왔다. 아내가 조금이라도 싼값에 구입하기 위해 이리저리 알아보는 것을 딸이 눈치채고 그냥 구입한 것이다. 아내와 상의도 없이 구입했다. 만약 상의를 했다면 아내는 아직도 예전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TV와 전자레인지도 애들이 사서 들고 온 것들이다. 내게는 태블릿 PC를 선물해 줘서 잘 쓰고 있다. 글을 쓰기 위해 어떤 것이 좋은지 알아보라고 했는데, 딸이 덜컥 구입해 버린 것이다. 사위는 내가 쓰고 있는 면도기가 낡아 보인다며 면도기를 말도 없이 사서 보내 주었다. 나 역시 구입 전 상의를 했다면 아직도 구입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쓰고 있는 휴대 전화 와 자판도 애들이 구입해서 전달한 것이다. 이런 물건들을 보면 애들이 생각난다.
오늘 길을 걸으며 물건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물건에는 추억이 담겨있다. 그래서 그 물건은 가격을 떠나 의미가 있다.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가능하면 서로 독립적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고 먼저 연락을 취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애들이 이미 깊숙하게 우리 삶 속에 들어와있다. 가족이 이런 것인가 보다.
길도 추억이다. 동행, 날씨, 마음 상태, 계절, 분위기에 따라 같은 길도 다르게 느껴진다. 심지어 매일 걷는 길도 매일 느낌이 다르다. 하늘의 구름도 변하고, 주변의 나무와 꽃들도 변하고, 바람도 다르다. 요즘은 홀로 걷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다. 홀로 걷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이런 재미를 당분간 누려보고 싶다. 혼자 길과 함께 쌓아가는 추억이 나이 들어 삶의 활력이 될 수도 있다. 홀로 걸으면 길과 더 친해진 느낌을 받는다. 길과 물건 등 보고 만지고 느끼는 삼라만상이 추억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