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의 걷기 일기 0107]

십우도 (十牛圖)

by 걷고

코스: 20200826 – 20200827 20km

누적거리: 1,722

평균속도: 4.5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태풍 바비가 생각보다 조용히 지나갔다. 예상보다 서쪽으로 조금 더 치우쳐서 움직이는 덕분에 큰 피해는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수해와 코로나로 힘든 상황에서 태풍 피해마저 컸다면 많은 분들이 고통 속에서 힘들었을 것이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오늘 아침에 손녀가 우리 집에 왔다. 토요일까지 함께 지낸 후 집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만나니 너무 반갑고 사랑스럽다.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내와 둘이 조용히 지내다 손녀가 오니 집안은 금방 엉망이 된다. 기쁘면서 불편하다.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이 순간에 함께 있지 못한다면 손녀와 추억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 일기일회, 모든 기회는 한순간 밖에 머물지 않는다. 순간을 그대로 수용하며 함께 하는 것이 주어진 모든 기회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손녀와 함께 하는 순간에 가끔 불편한 마음이 고개를 들 때 십우도를 떠올린다.


십우도는 깨달음의 과정을 열 장의 그림으로 표현한 불화다. 소를 찾는 그림이라고 하여 심우 도라 고도한다. 한 소년이 소를 찾아 나서기 시작하는 십우도의 첫 그림이 ‘심우(尋牛)’다. 소년은 몸이고 소는 본성이다. ‘심우’를 하기 위해서는 ‘망우(忘牛)’를 자각해야만 한다. ‘망우’가 없다면 ‘심우’는 없다. ‘망우’를 자각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잊고 사는지 아닌지 늘 깨어있어야만 한다. ‘망우’를 자각하는 것은 마음공부할 준비가 된 것이고, ‘심우’는 발심(發心)이다.


오늘 손녀가 오면서 일상이 무너졌다. 그런 이유로 마음이 불편했다면 ‘망우’를 자각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여기에 머물지 못하고, 주어진 상황을 수용하지 못하고, 불편함을 느끼는 순간이 ‘망우’다. 불편함이 올라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망우’를 자각하는 것이다. 손녀가 집에 오는 순간, 나의 모든 일상은 손녀와 함께 하는 것이다. 일기일회다. 손녀 돌보는 것을 조금만 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마음을 내는 순간 이미 ‘망우’가 되는 것이다. 그 마음을 알아차리면 ‘심우’고, 손녀와 함께 노는 것이 바로 ‘득우(得牛)다. 그런 면에서 손녀는 나의 스승이 된다. 망우를 자각시키기 위한 시험대에 나를 올려놓은 것이다. 다행스럽게 오늘은 시험에 통과했다. 내일도 통과할지는 모르겠다.


십우도는 본성을 깨닫기 위해 수행하는 긴 세월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매 순간 십우도를 경험하기도 한다. ‘득우’를 한다는 것은 내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일이 되는 것이다. 이분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손녀를 돌보는 것이 아니고, 내가 손녀가 되는 것이다. 작은 일에서 배운 경험을 쌓아나가고, ‘망우’를 자각하며 꾸준히 노력해 가는 것이 수행이다.


십우도의 마지막 그림은 깨달음을 얻은 뒤 중생을 제도한다는 ‘입전수수’ 단계다. 경허선사는 말년에 마을에 내려오셔서 아동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고 한다. 제자들이 찾아와서 배움을 요청하면 잘못 찾아왔다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수월선사는 산마루에서 과객들을 위해 주먹밥과 짚신을 보시하셨다고 한다. 그러고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셨다고 한다. 깨달은 분들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마을 속에서 또는 사람 속에서 마을과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살아간다. 이 단계가 바로 입전수수 단계다.


오직 지금 이 순간만 존재한다. 매 순간의 모든 경험과 하나 되는 것이 ‘망우’를 자각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마음공부는 ‘망우’ 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밖에는 없다. 이런 귀한 진리를 일깨워준 손녀에게 감사함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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