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역 침범과 혼돈
코스: 20200912 8km
누적거리: 1,838
코스: 집 – 봉산 – 서오릉로, 응암역 – 불광천 – 집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토요일이나 평일이나 내게는 같은 휴일인데, 주말만 되면 마음이 더 가볍다. 아직도 사회생활했던 습관이 남아있다 보다. 오랜만에 집 뒷산인 봉산에 올랐다. 이슬비가 차분하게 내리고 있다. 이런 비는 맞아야 제맛이 난다. 배낭 커버만 씌우고 모자를 눌러쓴 채 반바지와 등산화를 신고 스틱과 함께 걸었다. 흙냄새와 숲 내음이 좋다. 오랜만에 봉산 길을 걸으니 감회가 새롭다. 마치 애인을 만난 듯 마음이 설렌다. 풀도 부쩍 크게 자랐고, 나무들이 서로 엉겨서 숲 터널을 만들어 놓았다. 마치 나를 환영하기 위해 만들어 놓았다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들이 보이면 서로 마스크를 올려 쓰거나, 몸을 틀어 등을 맞대고 지나간다. 비말이 신경 쓰여 조심하는 모습이 마치 서로 보기 싫어하는 사람을 외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저 앞 벤치에서 한 사람이 앉아서 운동을 하며 기합 소리를 내고 있다. 앞으로 지나가려다 비말이 신경 쓰여 그분 등 뒤로 걸었다. 그런 행동을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며 저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사람이 사람을 피해서 다니고,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대화를 하지 않고, 걷고 있다. 코로나가 바꾸어 놓은 세상 모습이다. 길을 걸으며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반갑게 인사하고 조심해서 걸으라고 덕담을 하던 시절이 그립다.
생태학자 최재천 교수는 코로나나 앞으로 올 바이러스 질병의 주원인을 생태계 혼돈 때문이라고 한다. 과학적이고 생태학적인 지식이 전무한 나는 그냥 쉽게 영역 침범으로 이해하고 있다. 야생 동물의 영역이 인간에 의해 침해당하며 어쩔 수 없이 서로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게 되는 상황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야생 동물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 발생하지 않을 상황이 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그들의 살 곳을 빼앗아서 발생한 일이다. 욕심이 부른 참사로 스스로 만들어 낸 업보다. 공존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길을 걸으며 생태다리를 지난 적이 있다. 몇 곳 가보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본 생태다리 중에 앵봉산 생태다리와 무악재 하늘다리가 가장 인상에 많이 남는다. 아름답고 기능적으로도 잘 지어진 것 같다. 우리가 걸을 수 있는 길과 동물들이 지나갈 수 있는 일명 animal road가 구분되어 있다. 마치 차도와 인도를 구분해서 서로를 보호하듯이. 사람이 차도로 뛰어들거나, 차가 인도를 덮치지 않는 한 사고 날 일이 별로 없다. 이런 구분은 일종의 영역 표시로 서로를 보호하기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각자 자신의 길을 가거나 자기 영역 속에서 활동하기만 하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앵봉산 생태다리는 봉산과 앵봉산을 연결하는 다리로 서오릉로 건설을 위해 산이 잘린 곳에 설치된 다리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봉산에서 앵봉산으로 올라가려면 하산한 후에 횡단보도를 건너서 앵봉산 아래부터 올라가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리가 연결되어 앵봉산 중턱으로 바로 갈 수 있게 되어 많이 편해졌다. 오늘 앵봉산 생태다리를 유심하게 바라보았다. 동물들이 지나가도록 만들어 놓은 길에 숲이 우거져 보기 좋았다. 근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숲 속에 사람들이 지나가며 길을 만들어 놓았다. 사람들이 야생동물이 되었나 보다. 바로 옆에 우리가 걸을 수 있는 길이 조성되어 있는데도, 동물들이 다니는 길까지 침범하여 급기야 길을 만들어 냈다. 그들의 무지에 화가 난다. 멀리 돌아서 가는 길도 아니고, 바로 옆에 다닐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왜 동물들이 다니는 길에 자신들의 족적을 남겨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영역 침범은 서로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가장 기본적인 상식이다. 회사 내에서도 각자 맡은 영역에 대해서는 존중하고 간섭하지 않는다. 부부간에도 서로 지켜야 할 영역이 있고, 부모와 자식 간에도 지켜야 할 선이 있다. 각자의 삶을 존중하고 침범하지 않을 때, 나의 삶 역시 존중받을 수 있을 것이다. ‘너’와 ‘나’가 조화롭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은 좋지만, ‘너’와 ‘나’의 구분이 애매모호한 혼돈 속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어렵다. 함께 존재하는 다른 존재를 존중하는 것이 우리가 존중받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다른 존재를 존중하고 보호하자. 주어진 우리의 영역 안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지혜롭고 건강하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