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의 걷기 일기 0126]

친절함

by 걷고

날짜와 거리: 20201117 - 20201118 21km

누적거리: 2,545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어제 비가 차분하게 내렸다.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 비에 젖은 낙엽을 조심스럽게 밟으며 걸었다. 전 날은 낙엽 밟는 소리가 좋았다면, 어제는 빗 속을 걷는 차분함이 좋았다. 함께 걸었던 길동무들도 모두 좋아한다. 은행나무 밑에 쌓인 노란 낙엽으로 어떤 사람이 하트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젊은 사랑이 만들어 놓은 아름다운 낙엽 하트다. 부디 그들이 평생 오늘의 정성과 사랑을 유지하며 살아가길 바란다.


아침에 건강검진받으러 홍대 근처 병원에 다녀왔다. 이제는 검진받으러 가는 것도 괜히 내심 걱정이 된다. 걱정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도 사람 많은 곳에 가서 번거로운 절차를 밟아가며 받는 검진 자체가 부담스럽고 귀찮게 느껴진다.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귀찮다기보다는 번거로움으로 인한 약간의 불안함과 두려움 같은 것이다. 뭔가를 혼자 새로운 환경에서 하는 것이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스스로 이해가 잘 되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로 인한 기다림과 번잡스러움이 불편해서 비 오는 날 아침 일찍 서둘러 나갔다. 앞으로 나이 들어가면서 병원 갈 일이 많아질 것이다. 질병에 대한 두려움보다 낯선 환경에 대한 불안함을 덜어 낼 필요가 있다. 새로운 환경에 좀 더 적응하기 위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 병원은 건강 검진을 위주로 하는 제법 알려진 ‘서울 본 내과 의원’이다. 접수를 마치고 기다리라고 한다. 조금 후에 호명을 한 후에 차트를 들고 임상병리실로 들어갔다. 소변 검사를 한 후에 피를 뽑는데 간호사가 웃으며 “비가 많이 와서 힘드셨죠? 내일부터는 날씨가 추워진다고 하는데, 건강 잘 챙기세요.”라고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검진에 대한 모든 불안감과 번잡스러움, 거부감, 불편함이 사라졌다. 그 간호사의 말 한마디가 불안에 얼어있던 마음을 녹여 주었다. 그 이후부터 모든 간호사들이 너무 친절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혈압이 높다며 의자에서 일어나 직접 혈압계로 다시 측정하는 의사의 친절한 태도가 환자를 중시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의사와 간단한 진료를 마친 후 ‘건강 검진표’를 언제 받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간호사가 친절하게 웃으며 답변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임상실험실 간호사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병원 전체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어 주었다. 3층에서 5층으로 왔다 갔다 하는 번거로움도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병원에서는 의사를 포함한 모든 직원들에게 서비스 마인드에 관한 교육을 잘 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친절함’이라는 단어가 주는 강한 영향력과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과연 나는 친절한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답은 ‘아니다’였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그다지 친절한 사람은 아니다. 물론 기본적인 예의는 잘 지키는 편이지만, 따뜻하거나 살갑거나 친절한 사람은 아니다. 게다가 상대방에 따라 대하는 태도와 말투가 너무 차이가 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주 공손하고 친절하게 대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곁을 내주지도 않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무시하기도 한다. 특히 내게 지시적이거나 권위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고 말을 섞지도 않는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주변에 가까운 사람들이 많은 편이 아니고, 소수의 사람들과 교류를 하며 지내고 있다. 물론 모든 사람들과 친하게 지낼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차별적인 태도로 대하는 모습은 그다지 성숙한 모습이 아니다.


오늘 만난 그 간호사는 매일 많은 검진 대상자들을 만나 얘기하고 피를 뽑고, 몸무게와 허리둘레를 측정하고, 시력과 청력 테스트를 한다. 예의 바르거나 웃는 손님도 있겠지만, 거들먹거리거나 인상 쓰며 반말하는 진상 손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만난 간호사는 내게 대하듯 모든 고객들에게 친절하게 웃으며 대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이런 ‘친절함’과 ‘미소’가 우리를 미소 짓게 만들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 그 간호사가 모든 손님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업무가 손님을 일선에서 만나 검사를 하는 사람이기에 업무에 아주 성실하게 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 간호사를 생각하다 산티아고 길에서 만났던 성당에 계신 신부님과 두 분의 자원봉사자 가 떠올랐다. 성당에 순례자들을 위한 알베르게를 운영하시며 성당을 찾는 모든 순례자들에게 ‘세족 의식’을 직접 거행해 주시고, 음식을 정성껏 만들고 대접해 주시는 분들이다. 그 성당을 찾아오는 순례자의 모습도 각양각색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머물렀던 그날 그분들이 보여준 자애로운 미소와 정성을 다하는 태도는 잊을 수가 없었다. 단지 하룻밤 머물다 떠날 별의별 순례자에게 이분들은 잊지 못할 감동을 선물해 주었다. 이분들을 통해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잠언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 잠언은 주어진 상황을 수용하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 자신을 내려놓고 지금 하는 일을 기꺼이 맞이하라는 말씀이다. 불행도 기꺼이 맞이하고 행복도 떠날 때가 되면 기꺼이 보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평생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멋진 사람, 좋은 사람, 기분 나쁜 사람, 만나기 싫은 사람 등.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마음으로 그 모든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이다. 걷기 동호회에서 길 안내를 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친절하게 대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기도 한다. 아직도 어리석어 분별심을 내고 있다. 오늘 간호사를 통해 산티아고에서 만난 세 분의 얼굴이 떠올랐고, 사람들에 따라 차별적으로 대하고 있는 나의 어리석음을 볼 수 있었다.


달라이 라마께서 미국의 한 대학에서 불교에 대한 강의를 하셨다. 강의 마칠 즈음 한 학생이 질문을 했다. “불교가 좋은 것은 알겠는데, 어렵기도 하다. 한 마디로 불교는 어떤 종교인가?’ 달라이 라마께서 말씀하셨다. “지금 바로 옆에 계신 분들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시고 따뜻한 미소를 대하는 것이 불교다.” 깊이 새겨야 할 말씀이다. 오늘 가르침을 주신 간호사분에게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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