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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의 걷기 일기 0152]

풍요 속의 빈곤

by 걷고

날짜와 거리: 20210102

코스:

누적거리: 2,883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새해 첫날은 집 밖을 나가지도 않고 하루 종일 집안에서 지냈다. 오전의 루틴 외에 TV와 넷플릭스 영화를 보고, 책 몇 쪽 읽은 것이 전부다. 가끔은 시간이 부족해서 허덕이며 지낼 때도 있었다. 바쁜 날은 하루가 조금 더 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오히려 시간을 더 아껴가며 알차게 보냈다. 반대로 하루 종일 자유시간이 주어지면 시간에 치여 하루 종일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부족할수록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고, 넘쳐날수록 더욱 낭비를 하게 된다. 풍요 속의 빈곤이다.


요즘 TV를 틀면 어느 방송사나 모두 트롯 경연 프로그램만 하고 있다. ‘미스 트롯’과 ‘미스터 트롯’을 할 때에는 트롯 경연 프로그램이라는 희소성과 오랜 기간 무명 생활을 견뎌낸 가수들의 인생 얘기를 듣느라 집중해서 시청했고, 열렬한 시청자가 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TV를 켤 때마다 모든 방송사가 트롯 경연 프로그램을 하니 식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다려왔던 ‘미스 트롯 2’도 첫 번째 방송만 시청했고, 관심이 멀어지면서 보지 않게 되었다. 넘치는 것은 부족함만 못하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보고 싶은 영화가 개봉하는 날을 기다리는 재미, 영화관에 가서 티켓을 구매하고 손에 쥘 때 느껴지는 희열, 그리고 좌석에 앉아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설렘이 좋았다. 근데 넥플릭스를 통해 언제든 영화를 볼 수가 있게 되니, 영화에 대한 설렘이 많이 줄어들었다. 예전에 비디오 가게에 가서 심사숙고하며 영화를 고르는 재미도 있었는데, 이제는 수많은 영화를 클릭 한 번으로 언제든 볼 수 있게 되니 영화에 대한 기대감이 많이 사라졌다. 참 변덕스러운 마음이다. 없을 때는 보고 싶어 미치겠고, 많을 때는 질려서 보기 싫어진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배고플 때 먹는 음식은 보약이고 꿀맛이지만, 언제든 먹을 수 있는 넘쳐나는 음식은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맛 집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비싼 음식을 먹으며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려 한다. 어느 식당에 다녀왔고, 얼마짜리 음식을 먹었다는 허세로 음식 맛을 대신하기도 한다. 물론 맛 집의 음식은 맛있고, 비싼 음식은 그만큼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아무리 비싼 대가를 치르며 먹고 마셔도 한 끼 음식이다. 음식이 주는 행복감도 크지만, 그 행복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는다. 그저 한 끼에 불과한 것이다. 오히려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떠드는 추억이 더욱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 넘쳐나면 어찌할 바를 몰라 문제가 되고, 부족하면 갈구하게 되기에 문제가 된다. 운동도 과하면 신체에 무리가 오고, 좋아하는 취미도 과하게 하면 질리게 되고, 과하게 먹으면 질병이 된다. 운동을 하지 않으면 신체에 무리가 오고,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못하면 갈구하게 되고, 먹지 못하면 병이 된다. 넘쳐나도 문제이고 부족해도 문제가 된다.


과유불급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러 방법 중 하나는 깨어있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 말, 태도 등을 자각하는 것이다. 알아차리면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지금보다 나은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고, 나쁜 방법을 택할 수도 있다. 다만, 선택에 따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자신에게 돌아간다는 사실만 알면 된다. 같은 언행, 태도, 마음가짐을 가지면서 자신의 삶이 변화되기를, 그것도 개선되기를 원한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다.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보다 나은 삶을 원한다면 그런 삶을 향한 노력과 변화가 있어야만 한다. 지금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명확하게 볼 수 있고 자각하게 되면 일단 절반은 성공이다. 그다음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부정적인 선택을 하면 부정적인 결과가 나올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다. 자신의 삶에 긍정적인 선택을 하게 되면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 역시 당연한 이치다.


이제 이틀 후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바쁜 날도 있을 것이고, 아무 할 일도 없는 날도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살 날이 줄어든다는 것이고, 줄어드는 시간만큼 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시간은 그저 시간에 불과할 뿐이고, 우리네 삶은 그저 삶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점점 시간의 소중함을 느껴가는 것은 살아갈 날이 줄어들기에 느끼는 감정일 수도 있다. 시간을 이끌고 가지는 못할 망정 최소한 시간에 치여 사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나는 나의 하루라는 시간의 주인이다. 시간이라는 ‘종’에 치여 사는 ‘주인’이 되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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