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의 나 (미로)

미로

by 걷고

사면이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답답하고 막막하고 갑갑하다, 정면의 벽은 현재 삶의 난관의 벽이고, 좌우의 벽은 검은색과 흰색으로 낮과 밤, 즉 시간의 벽이고, 뒷면의 벽은 과거의 상처, 경험, 갈등의 벽이다. 벗어나려 저항을 하면 할수록 사면의 벽은 점점 더 강하게 압박을 가해오고, 가만히 있으면 벽 역시 움직이지 않는다. 벽을 의식하지 않고 아래를 보고 뚜벅뚜벅 걸어가면 사면의 벽이 동시에 뒤로 물러나며 숨 쉴 공간을 만들어 준다.

캠프 장소인 피정의 집에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눈을 사로잡은 것은 돌로 만들어진 미로(Labyrinth)였다. 그 길을 여러 번 거닐면서 길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주어진 길을 가는 것이라는 확신이 강해졌고, 직업의 영어 표현 중 하나인 calling (신의 부르심)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었다. 또한 미로를 걸으며 불확실한 미래를 보려고 애쓰지 말고, 지나온 과거에 미련을 갖거나 과거로 인해 현재를 낭비하지 말고, 그냥 지금-여기 바로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곳에서 주어진 길을 묵묵히 가라는 의미도 느낄 수 있었다. 미로의 끝 부분에는 길이 끊기며 두 개의 낮은 가로등과 앉아 쉴 수 있는 평평한 돌이 있다. 잠시 앉아 보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가벼워졌다. 삶의 막다른 길에 봉착하여 움직일 수 없을 때 빨리 빠져나가려고 발버둥 치지 말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잠시 쉬며 삶의 저항을 줄일 수 있도록 자신을 낮출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고, 그 숨은 삶의 무기력에 활기를 불어넣어 준다.

미로를 다시 걷는데 문득 내가 느끼는 사면의 벽은 실재(實在)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심상으로 만든 가상의 벽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변화가 일어났다. 벽이 스스로 허물어지면서 정면의 벽은 미래를 위한 희망의 다리로, 측면의 벽은 지혜로움으로, 뒷면의 벽은 삶의 든든한 디딤돌로 변하기 시작한다. 사고와 관점의 변화는 절망을 희망으로, 고통을 행복으로, 불안함을 평온함으로 변화시켜 준다. 삶 자체가 고통의 바다라고 하였지만, 실은 그 고통은 작은 나로부터 탈피하여 큰 나로 태어나기 위한, 나와 너의 벽을 허물기 위한, 자신과 모든 존재를 수용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기 위한 멋진 선물이자 축복이다.

상담사로 참가를 했던 이번 캠프에서 나는 노숙인 되었고, 노숙인 선생님들이 나의 상담사가 되어 그들의 경험과 현실을 통해 내게 사는 법을 가르쳐주시는 나만을 위한 맞춤형 캠프였다. 어떤 선생님은, ‘지금 내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기에 올라갈 일만 남았다. 비록 앞은 막막하지만 오늘 주어진 일을 할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은 깊은 울림을 주셨으며, 미로에서 느꼈던 진리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한다.

선생님들과 나와 다르지 않음에도 참가 전에 노숙인 선생님들에 대한 경계심을 느꼈던 나 자신의 부끄러움을 글을 통해 진심으로 참회하며 용서를 구한다. 큰 가르침과 통찰을 주신 모든 선생님들, 캠프를 위해 애를 쓰신 모든 선생님들, 음식과 좋은 장소를 제공해주신 수사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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