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 읽기 모임을 시작한 지 벌써 7주가 지나가고 있다. 참석자들의 느낌과 생각을 들으며 자신의 생각을 돌아보기도 한다. 두 달 정도 기간을 통해 서로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를 하고 있어서 모임 분위기는 점점 더 진지해지고 활기를 띤다. 책 제목은 ‘성경 인물에게 배우는 나이 듦의 영성‘이다. 성경 속 20명의 인물들의 삶을 통해 삶의 지혜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비신자인 나로서는 성경 속 인물들에 대한 기초 상식이나 배경이 없어서 흠뻑 빠져 들지 못해 매우 안타까웠다. 스님들이나, 불교 경전 속 인물들이었다면 훨씬 더 몰입하며 읽을 수 있었고, 따라서 글의 내용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자들에게는 가장 기본적인 내용과 지식도 비신자인 내게는 매우 생소하고 낯설게 느껴진다. 특히 20명의 인물들이 성경 내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 분인지, 또 성경 속 대표 인물로 소개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들기도 한다. 인물들에 대한 이해 없이 오직 글에 나온 내용들만으로 이해를 하려고 하니 주제는 사라지고 해제만 읽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영성이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하나님을 믿고 거듭난 모든 자녀들에게 주어진 영적인 성품을 말한다.” (네이버 백과) 영적인 성품을 갖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을 버리고 온전히 자신을 하느님에게 맡기는 것이다. 자신의 몸과 마음, 혼령과 의식 등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자각하고 체득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다시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다. 지금의 몸과 마음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한 꼭두각시에 불과하고, 노예의 삶에 불과하다. 믿음이 생기면서 비로소 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전자는 ‘거짓 나’가 되고, 후자는 ‘참 나’가 된다. ‘거짓 나’에서 ‘참 나’로 변환되는 과정은 사람에 따라 매우 쉬울 수도 있고, 죽을 때까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자아가 강하면 강할수록 어려워진다. 반면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쉬워진다. 종교의 기본 바탕은 믿음이다.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 부처임의 말씀에 대한 믿음의 바탕 위에 정진과 인내의 담금질을 통해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같은 세상은 이미 다른 세상이 되어버리고,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은 고마운 스승이 되고, 역경은 나의 믿음을 담금질하기 위한 수행의 장이 된다.
“우리가 정진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그 무엇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법정 스님) 불교 수행의 목적을 단 한 문장으로 축약해서 매우 간결하게 표현한 말씀이다. 어느 선사(禪師)께서 “깨달음이란 세수하다가 코를 만지는 것처럼 쉬운 일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미 이루어진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은 세수하다 코를 만지는 것처럼 이미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말은 쉽다. 하지만 이런 자각을 체득하기가 쉽지 않다. 바로 ‘거짓 나’를 ‘참 나’로 착각하고 ‘거짓 나’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 나’가 ‘참 주인’되어서 우리를 종 부리듯 갖고 놀고 있다. 우리는 ‘거짓 나’가 ‘참 주인’이라고 착각하며 종노릇을 기꺼이 하고 있다. 몸은 편안하고 따뜻한 것을 추구한다. 눈은 보기 싫어하는 것을 피하고, 혀는 맛난 음식만을 찾아다니고, 귀는 듣기 좋은 소리만 듣고, 코는 향기로운 냄새만 쫓고 있다. 이런 욕심으로 인해 자신이 ‘참 나’의 주인임을 점점 더 잊고 살아간다. 그리고 ‘거짓 나’는 점점 ‘참 나’보다 더 ‘참 나’가 되어 간다. 가면이 가면의 주인이 되어버리고, 가면의 주인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정신 차리고 주인의 자리를 되찾아야만 한다.
하느님을 온전히 믿기 위해서는 ‘거짓 나’를 완전히 버려야만 한다. ‘거짓 나’를 확실하게 자각하는 것이 바로 ‘무아의 체득’이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아를 체득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지금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 ‘거짓 나’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이렇게 되면 세상사의 희로애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 매몰되지 않으며 일희일비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
“나를 비우니 그가 가지고 있는 것과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비교할 일이 없고, 그것으로 질투하거나 시샘할 일도 없다. 오히려 그 안에 있는 좋은 것이 환하게 빛나, 그 빛이 내게 반사되니 나는 찬미할 일밖에 없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세상사가 힘든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비교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이다. 꽃을 갖고 있는 사람이 펜을 들고 있는 사람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바위가 꽃이나 나무를 시기할 필요가 없듯이. 자신의 주인으로 살아가기만 하면 세상사 참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데, ‘거짓 나’의 노예로 살아가다 보니 비교하며 따라 하기 바쁘다. 비교하는 시간과 에너지, 또 따라 하기 위해 애쓰는 시간과 에너지를 자신의 ‘참 나’를 찾는 창조적인 삶에 사용할 수 있다면 세상사는 기쁨과 편안함으로 가득할 것이다. ‘거짓 나’로부터 벗어나 ‘참 나’를 찾는다면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거짓 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시도하고 있는 작업이 있다. 떠오르는 생각이나, 느껴지는 감각과 감정이 ‘참 나’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고 나와 분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어떤 사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일어나면 ‘거짓 나’가 ‘참 나’를 희롱하고 있다고 알아차리는 연습이다. 어떤 상황으로 인해 불편한 감정이 올라오면 ‘거짓 나’가 ‘참 나’를 갖고 장난치고 있다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지금의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나를 분리하는 작업이다. ‘몸의 불편함’이 발생하면 ‘몸’이 불편한 것이지 나 자신이 불편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연습이다. ‘거짓 나’의 관찰자가 되어 ‘거짓 나’의 놀음에 놀아나지 않는 연습이다.
“자유는 당신이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는 걸 깨달을 때 시작됩니다. 생각하는 자를 관찰하기 시작하는 순간, 더 높은 수준의 의식이 깨어납니다. (...........) 자유의 출발점은 당신 자신이 소유하는 실체, 즉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깨닫는 순간입니다.” (에크하르트 톨레의 이 순간의 나, 본문 중에서)
‘나이 듦의 영성’은 ‘참 나’를 찾는 일이다. 나의 주인이 되는 일이고 존재의 본질을 깨닫고 체득하는 일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인지, 왜 태어났는지를 확인하고 알아가는 과정이다. 죽기 전까지 찾지 못하더라도 찾고자 하는 노력을 계속되어야만 한다. 그 과정이 바로 삶이자 삶의 목적이 될 수도 있다. 나의 영성은 무엇인가? 아직 깜깜하다. 다만 깜깜하다고 생각하는 나, 즉 관찰자가 아직 살아있어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