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읽다 15]

영화 ‘부활’

by 걷고

날짜와 거리: 20220514

코스: N/A

평균 속도: N/A

누적거리: 6,788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독서치료 모임인 ‘행복한 책 읽기’의 마지막 주제는 영화 ‘부활’이다. 책 대신 영화를 시청한 후에 서로의 감상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영화는 노트북이나 휴대전화 같은 작은 화면으로 보는 것보다는 영화관에 가서 넓은 스크린과 생생한 음향을 들으며 보는 것이 훨씬 더 낫다. USB로 전달받은 영화를 노트북으로 보려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소리가 없는 영화는 죽은 나무처럼 생기가 없다. 구매해서 휴대전화로 영화를 보긴 봤지만, 감동이 떨어진다. 숙제하는 기분으로 영화를 본다는 것 역시 감동을 감소시킨다. 영화는 편안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영화관에서 혼자 보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다.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서 몰입해서 영화를 봐야 제대로 영화를 즐길 수 있다.


비신자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영화가 주는 감동은 별로 없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가르침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인 것 같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지 3일 후에 부활해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보여준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그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며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펼친다. 부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각자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널리 전법활동을 하며 불법을 알리라고 말씀하셨다. 두 분의 가르침을 펼치는 방식이 같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그분들의 사명이고 할 일이다. 혼자만 알고 편안한 삶을 살아간다면 그 종교는, 또 그 가르침은 무의미할 뿐이다.

영화를 보는 관점은 호민관인 클라비우스의 삶에 맞춰져 있었다. 집정관과 호민관 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과 호민관이 국민들을 통제하며 발생하는 갈등에 초점을 맞추며 영화를 봤다. 황제의 방문을 기회로 자신의 출세를 위해 국민들을 통제해야만 하는 집정관의 권력욕이 보인다. 집정관의 명령에 따라 국민을 직접 통제해야만 하는 호민관의 내적 갈등도 보인다. 출세를 하고 싶은 야망과 국민들의 고통, 이 둘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는 호민관의 모습이 차라리 애처롭기도 하다. 집정관은 호민관에게 권력을 잡고 부귀를 얻은 후에 무엇을 구하는가라고 묻는다. 호민관은 ‘평화’라고 답한다. 자신의 평화를 얻기 위해 국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짓밟으며 자신의 마음도 짓밟는다.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호민관이 느끼는 갈등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그는 호민관의 자질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예수님께서 광야로 그를 몰아냈는지도 모른다. 광야를 건너며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는 시험 과정일 수도 있다.

국민을 위한 정치를 펼치는 집정관과 국민을 보호하는 호민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집정관은 오직 자신의 부귀와 영달을 위해 국민들을 탄압한다. 호민관은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고 집정관과 황제를 보호한다. 국민을 위하는 관리들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국민들은 생존을 위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또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종교에 의지하거나 선지자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다. 정치인들이 국민을 통제하기 위해 종교를 탄압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의 현실은 정치와 종교가 대립하는 것처럼 보여도 속내는 서로 이용하는 관계로 전락하고 있다는 느낌도 받는다. 정치와 종교 모두 각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마음에 점점 이 두 가지에서 마음은 멀어지고 있다. 오히려 이 두 가지와 조금 거리를 두고 나니 본질에 좀 더 가까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호민관의 모습을 보며 효봉 스님이 떠올랐다. 효봉 스님은 일제 강점기 때 판사를 지낸 분이다. 죄수에게 사형을 언도한 후 심한 고통에 시달리시다 어느 날 갑자기 출근길에 엿장수가 되어 전국을 돌아다닌다. 3년 간 방황의 시간을 보낸 후 출가하며 가행정진을 이어간다. 엉덩이 살이 좌복에 짓무르게 되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수행을 해서 ‘절구통 수좌’라는 별명도 얻는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법정 스님이 효봉 스님의 상좌이다. 제방 선원에서 참선 수행에 전념한 후 송광사 조실로 머물렀고, 그 이후 해인사 방장 스님으로 추대되었다. 나중에 종정에 취임하신 큰스님이다. 호민관의 삶과 효봉 스님의 삶이 오버랩된다.


‘부활’의 사전적 의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이다. 보고 만질 수 있는 육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종교적인 의미를 완전히 제외한 해석이다. 하지만,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의 얘기를 모아 놓은 책을 읽어본 적도 있고, 티베트의 한 고승이 죽음을 체험한 후 다시 태어나 사후세계를 묘사한 ‘티베트 사자의 서’라는 책도 있다.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일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육체의 소멸 후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을 여전히 믿을 수 없기에 부활의 의미를 나름대로 재해석해 보았다.


불교에서는 매 순간이 생사윤회의 과정이고 삶은 이 과정의 반복이라고 한다. ‘어제의 ‘나’는 이미 ‘지금의 나’가 아니다. ‘어제의 나’가 사라진 후에 ‘오늘의 나’가 있다. 본인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자연의 섭리이다. 모든 유정, 무정 존재들은 ‘제법 무상’이라는 진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제’와 ‘오늘’이라는 하루의 시간도 생사의 과정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길다. 오히려 ‘찰나’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수도 있다. 몸의 노화현상도 진행되고, 손톱도 자라고, 머리도 자라고, 내장 기관도 사용한 만큼 기능이 떨어진다. 새로운 삶은 과거의 삶을 거름 삼아 만들어지고 다시 다음 생의 거름이 된다. 생사의 모습이 자연의 모습과 같다. 무성한 나뭇잎은 낙엽이 되어 나무를 위한 거름이 된다. 이 과정의 나무의 부활이고 생사윤회이다.

클라비우스와 효봉 스님의 모습을 보며 부활의 의미를 되새겨 봤다. 과거의 고통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얻는 과정이 수행이고, 삶이고, 우리 존재의 이유이다. 과거의 모습이 죽고 사라져야만 새로운 자신으로 태어난다. 클라비우스는 국민들을 탄압하는 ‘호민관’이라는 자신을 죽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부활했다. 효봉 스님은 한 사람에게 사형을 언도한 후에 ‘판사’라는 자신을 죽이고 자비를 베푸는 사람으로 부활했다. 과거를 죽이는 일은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속세의 권력, 부귀, 명예 등을 버려야만 출세간적인 삶에서 오는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 과거의 자신이 사라지며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더욱 악독한 호민관의 삶이나, 일제 권력에 붙어 자신의 영달을 취하는 삶이 그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호민관과 판사의 허망함을 깨닫고 마음의 평화를 위해 종교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고, 선택에 따른 결과 역시 스스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부활은, 윤회는, 삶은 좀 더 나은 삶을 위한 과정이며 몸부림이다. 알을 깨고 나와 병아리가 되고 닭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아픔을 겪어야만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아니면 알 속에서 썩어 갈 수도 있다. 행복과 불행의 경계는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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