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코스 ~ 11코스 (궁항 - 하동호 -삼화실 - 이정)
궁항마을 민박집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에 주인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번 장기 도보에서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참 많다. 혼자 걸을 때에는 거의 주변 사람들과 얘기하는 편이 아니어서 길 외에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다. 하지만, 이번에는 같이 걷는 길동무 덕분에 주변 사람들과의 행복한 인연을 만들어 나간다. 길 가에서 일하시는 마을 주민들의 미소가 기억난다. 중항 마을에서 집을 단장하는 미소가 우아한 여주인과의 만남, 커피숍의 친절한 젊은 여주인, 둘레길 안내센터에서 만난 친절하고 고마운 직원들, 민박집 사장님 등 많은 사람들과 즐거운 인연을 만들며 걸었다. 길을 걷는 즐거움 중 하나가 ‘사람’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얻은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단순하고 반복적인 신체의 움직임만을 하는 것이 아니다. 길을 통해서 또 길을 걸으며 다양한 사람, 풍경, 환경, 음식 등을 접하며 자신의 범위를 넓혀나갈 수 있다. 여행은 자아의 확장을 위한 좋은 방편이다. 자아의 확장은 자기 프레임의 변화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자신이 만들고 쌓아왔던 정체성이 깨어지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간다. 이런 변화를 만들어 가는 데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도보 여행이다.
오늘 걷기는 지원조도 함께 걷기로 했다. 승용차는 민박집에 두고 함께 걸어 이정마을까지 간 후에 다른 차를 이용해서 차를 픽업하러 가기로 했다. 좋은 결정이다. 지원하는 것도 고맙지만 같이 걷는 것이 훨씬 더 좋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즐거울 수도 있지만,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경험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서로를 좀 더 아끼고 존중하며 수용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같이 걸으며 쌓은 아름다운 추억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고, 언제 만나도 그 기억을 공유하며 즐거운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다. 함께 지낸다는 것은 추억의 공유를 의미한다. 그래서 더욱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해야만 한다. 일방적인 관계나 균형을 잃어버린 관계에서는 참다운 소통을 기대할 수 없다. 소통이 되지 않는 관계는 피상적인 관계에 불과하다. 특히 자기중심적이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의 욕구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요구만 하는 타인 착취의 관계는 바람직한 관계가 아니다. 존중, 배려, 이해, 신뢰, 균형감을 이룬 관계 형성이 오랜 우정과 좋은 관계를 이루는 데 무엇보다 중요하다.
주인과 사진을 찍은 후 포장도로인 언덕길을 오른다. 마을 주변 도로는 대부분 포장도로이다. 포장도로 덕분에 주민들은 트럭이나 경운기 등을 이용해 농작물을 편리하게 경작할 수 있다. 길가에는 밤이 많이 떨어져 있다. 길을 걸으며 길동무들이 밤 줍기에 정신이 없다. 마치 사냥을 위해 산을 뛰어오르듯, 밤을 줍기 위해 길을 걷는 느낌이다. 환갑을 넘긴 60대 중반의 사람들이 길가에 떨어진 밤을 주우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모두 초등학생이 된 것 같다. 밤 줍는데 정신이 팔려서 힘든 줄 모르고 오르막을 오른다. 날씨는 너무 청명하다. 파란 하늘은 그 맑은 파랑이 더욱 짙고 하얀 구름은 더욱 하얗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자신을 드러내며 서로를 밝혀주고 있다. 자리이타이다. 포장도로를 따라 걷다가 산길로 접어든다. 계곡에 흐르는 물이 작은 물길을 만들고 물을 건너기 위해 천연 돌다리가 저절로 만들어졌다. 그 아담하고 소박한 징검다리가 정겹다. 수다를 떨고 웃으며 계속 걷는다. 대나무 숲이 나온다. 제법 깊은 숲이고 긴 숲이다. 좁은 길에는 대나무 잎이 많이 깔려있다. 대나무 숲 향도 난다. 마치 카펫 위를 걷는 듯 푹신한 천연 대나무 잎 위를 구름 걷듯 걷는다.
숲을 지나니 하동 호수가 눈앞에 펼쳐진다.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벤치와 스탬프 함이 바로 보인다. 간식을 먹고 잠시 쉬며 하동호를 바라본다. 벤치에 어린 소녀가 놀고 있다. 길동무들은 그 소녀에게 다가가 간식을 나눠주며 사진 한 장 같이 찍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조부모 같은 우리들의 모습을 보며 그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할까 라는 상상을 하며 홀로 웃음 짓는다. 하동호 주변으로 데크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넓은 호수를 모두 바라보며 걸을 수 있게 길이 만들어졌다. 시원한 호숫가를 걷는 상쾌함은 피로를 잊게 만들어 준다. 하동호 주변을 걸은 후 길은 마치 끝난 듯 자취를 감춘다. 안내판을 보니 왼쪽으로 내려가는 좁고 가파른 계단길이 보인다. 계단을 내려가 좁은 농로는 지난다. 넓은 개천이 보이고, 개천에 놓인 징검다리가 나타난다. 징검다리 위에서 길동무들이 손을 들고 서서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다. 평상시에는 관심도 두지 않는 이런 돌다리가 우리의 동심과 향수를 자극하며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일깨워준다. 돌이켜보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일들이 너무 많은데 느낄 여유가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마을로 들어선다. 주변에 식당이 제법 보이고 경찰서도 보인다. 평촌 마을이다. 청암면 보건 지소 옆에 벤치가 놓여있다. 금연 안내문구 위에 누군가가 담배 꽁초를 투명 테이프로 붙여놓았다. 못된 사람이다. 왜 그런 짓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횡천강을 따라 걷는다. 길가에 돌배나무 밭이 많다. 이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돌배를 한 두 개씩 따서 들고 가는지 경고문이 붙어있다. 이 길이 잘 유지되기 위해서는 걷는 사람들이 주민들에게 어떤 사소한 피해도 주어서는 안 된다. 매년 5% 정도 지리산 둘레길이 변경되는 주된 이유가 바로 주민들의 농작물 피해 때문이라고 한다. 길을 허락해 주신 마음에 감사함을 지니고 걸으면 좋겠다. 강변의 평상에서 점심 식사를 한다. 길동무가 가져온 군용 식사, 다양한 과일과 주스, 에너지 바 등을 먹으며 휴식을 취한다. 걷는 재미와 함께 먹는 재미도 여행의 큰 즐거움이다. 길동무는 음악을 틀어 분위기를 띄운다. 길을 걸으며 음악을 듣고 함께 춤을 추기도 한다. 즐거워서일까? 아니면 힘든 것을 잊기 위한 몸부림인가? 구분이 되지는 않지만, 그런 모습이 함께 걷는 길동무들에게는 긍정적인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관점 마을을 지나 상존티 마을회관과 존티재를 오르는 긴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존티재 오르는 길이 만만치 않다. 둘레길 안내 책자에는 이 길의 난이도가 ‘하’로 나와 있지만, 존티재 오르는 길만 생각하면 ‘상’으로 표기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존티재 정상에 스탬프 함이 있다. 길동무 중 한 명은 이곳의 스탬프는 두 개를 찍어야 한다고 할 정도로 힘든 코스였다. 앞에 서 있는 장승들도 혀를 내밀고 있다. 장승도 이 길을 오르는데 힘들었나 보다. 존티재를 지나 삼화실 안내소에 들렸다. 이곳은 민박으로도 운영되는 곳이라고 한다. 직원에게 뭔가를 물어보고 싶었는데, 술을 마셨는지 얼굴이 붉게 오른 두 명의 중년 남성이 응대하는 태도가 너무 불량하다. 그들의 소속이 어디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왜 그곳에 있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이다. 아예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게 손사래를 치며 스탬프 함은 문 밖에 있다고 소리친다. 불쾌했다. 시설은 넓고 좋은데 운영하는 사람들도 문제이고 이 좋은 시설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있어서 안타깝기도 하다.
불쾌함을 빨리 떨치고자 서둘러 나온다. 여기서부터 이정마을까지는 약 500미터 정도이다. 숙소 주소를 갖고 찾아간다. 집집마다 주소 안내판이 붙어 있어서 찾기 쉬운데 오늘 숙소인 ‘산도리 민박’ 집이 보이지 않는다. 민박집 안내문도 보이는데 집을 찾을 수가 없다. 길동무 한 명이 먼저 들어가서 씻는다고 연락이 와서 큰 소리로 길동무를 부르며 찾는다. 폐가처럼 보이는 곳을 지나 튼튼하게 지은 집 보인다. 출입문도 마치 성곽 문처럼 무거운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오른쪽 문은 여성용 숙소이고, 왼쪽 문은 남성용 숙소다. 씻고 나니 저녁 식사를 하러 나오라고 한다. 주인이 사는 집은 숙소와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다. 주인과 반갑게 인사를 한 후에 방에 들어가서 깜짝 놀랐다. 진수 성찬이 차려져 있다. 지금까지 9일간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오늘 저녁 식사가 가장 훌륭하다. 음식 맛이 간도 강하지 않고 적당해서 입맛에 맞는다. 안주인은 우리가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쳐다본다. 그 얼굴에서 따스함과 넉넉함, 푸근함이 느껴진다. 얼굴 표정에서 그분의 살아온 삶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나이 들어가면서 닮고 싶은 얼굴이다. 안주인 덕분에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