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지리산 둘레길 8일 차

9코스 ~ 10.4코스 (덕산 - 위태 - 궁항)

by 걷고

이층 침대가 비치된 민박집에서 하룻밤 머물렀다. 민박집 분위기는 마치 전원주택 같다. 주인의 푸근한 인상과 손님과 그냥 지나치는 사람을 구별할 줄 아는 똑똑한 개 두 마리가 있다. 아침 식사는 채식 위주의 식단이다. 수란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찰 음식 같다. 도토리 묵이 찰 져서 쉽게 부서지지 않는다. 주인이 직접 만든 것이라 한다. 아침에 일어나 민박집 주위를 둘러본다. 민박집 바로 뒤편에 작은 동산이 있다. 그 산이 이 민박집을 보호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른 아침 짙은 안개와 산을 덮은 구름이 가득하여 마치 신선 세계에 들어온 느낌이 든다. 민박집을 나와 길을 나선다. 집 앞의 풍경도 짙은 안개로 가득하다. 답답하다는 느낌보다는 차분함과 선계의 풍경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


길 초입에 위치한 남명 조식 기념관에서 스탬프를 찍었다. 퇴계 이황과 더불어 당대 영남학파의 양대 봉우리인 남명 조식 선생님을 기리는 기념관이다. 선비의 향기가 느껴진다. 기념관을 청소하시는 나이 드신 분들의 얼굴이 맑아 보인다. 거기서부터 덕천 강변을 따라 걷는 길이 계속된다. 덕천 강변 초입에는 소나무 밭이 가득하다. 걷기에 참 좋은 길이다. 멀리 보이는 산 중턱에 구름이 걸려있다. 덕산은 꽤 큰 마을이다. 규모가 큰 시장도 보이고, 주변에 음식점과 가게들이 즐비하다. 소나무 길에는 쉼터도 있고, 쉼터 내에 책을 보관하여 시민들이 편안하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배려도 해 놓았다. 천평교를 지나 강변 건너편을 걷는다. 숙소에서 바로 건널 수도 있는데, 일부러 돌아서 갈 수 있도록 길을 조성했다. 한쪽에서 보는 풍경과 반대편에서 보는 풍경은 다르다. 걷는 사람들에게 마을의 이모저모를 보여 주기 위한 배려일 것이다. 급한 일도 없으니 굳이 빨리 목적지에 도착할 이유도 없다. 두루두루 주변의 풍경을 즐기며 여유롭게 걷는 것이 좋다.


지리산 둘레길 중태 안내소가 보인다. 이곳은 기존의 지리산 둘레길 안내소보다는 그 규모가 작고 근무하는 분도 한 사람 뿐이다. 안내소라기보다는 스탬프를 찍고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다. 지리산 둘레길은 2007년 사단법인 숲길이 창립되어 조사와 설계를 시작한 이래 2014년까지 22개 구간 285km가 개통되었다고 한다. 정부 지원 없이 길을 관리하고 운영하기 위해 ‘지리산 둘레길 스탬프 포켓 북’ 외에 ‘지리산 둘레길 전 지도’ 등 걷기 위해 필요한 책자와 기념품, 안내 책자 등을 판매하고 그 수입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정부 지원이 있으면 길 조성과 관리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쉬움이 있다. 각 지자체마다 길을 조성하고 있다. 국민의 건강 도모를 위한 좋은 정책이다. 건강보험공단에서 지원해도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병원을 찾는 대신 길을 찾아 걸으며 심신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안내소에 근무하는 분이 뱀을 조심하라고 한다. 찾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그분은 뭔가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눈치이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인사를 한 후에 길을 걷기 시작한다.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지루한 포장도로이다. 햇빛은 강하고 도로는 뜨겁다. 중간 중간 쉬면서 물도 마시고 간식도 먹으며 체력 관리를 한다. 감나무 밭이 많고 감이 많이 떨어져있다. 밤도 많이 떨어져있다. 오르막 정상 근처에 종교 시설 같은 쉼터가 있다. 벤치가 있고 종교 서적이 몇 권 놓여있다. 그곳에 놓여있는 장독대가 정겹다. 벤치에 앉기는 조금 어색해서 그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약 팔순 정도 되어 보시는 분이 제초기를 돌리시려는데 잘 안 되는 것 같다. 길동무에게 도움을 요청하신다. 길동무의 도움으로 제초기를 켜신 후 주변의 풀을 제거 하신다 굳이 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분에게는 그 일이 오늘 하실 일이다. 시골에 사는 분들은 몸을 움직이며 하루하루 보낸다. 각자 할 일이 있다. 몸을 움직이시는 일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목도 마르고 조금 지쳐가니 시원한 막걸리 한 잔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오르막 길 정상에 쉼터가 있고, 막걸이와 간단한 간식거리를 판매한다는 안내판이 보인다. 전화를 했더니, 주인이 외출 중이라 오늘은 가게를 열지 못한다고 한다. 아쉽다. 주인 없는 쉼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돈을 놓고 가더라도 시원한 막걸리나 맥주 한 잔 마시고 싶어 마당에 놓인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아무 것도 없다. 그런 어수선함을 느끼셨는지 바깥주인이 옷을 추스르며 나오신다. 순간 희망이 보였다. 맥주를 주문해서 마셨다. 갈증을 풀며 꿀 맛 같은 휴식을 취했다. 잠시 쉬면서 맥주 한 캔 마시고 다시 걸을 준비를 한다. 걷는 사람은 어디든 잠시 머물고는 떠나야 한다. 떠나기 위해서는 미련을 갖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건, 집이건, 음식이건, 만나고 먹고 머물면 모든 미련을 버리고 자유롭게 떠나야한다. 그것이 걷는 자의 숙명이다. 만나는 순간 온전히 그 사람에게 집중하고, 먹는 순간 음식에 집중하고, 그 자리를 떠날 시간이 되면 훌훌 털어버리고 길을 가야 한다. 하긴 우리네 삶도 같을 것이다. 만난 사람들과 헤어지게 되어 있고, 머물던 곳에서 떠나게 되어 있다. 길을 걸으며 이렇게 당연한 진리를 체득하게 된다.


중태재를 지나 대나무 숲길을 만난다. 대나무 밭이 산에 많이 산재해 있다. 누군가가 어떤 목적을 갖고 키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을 정도로 정돈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자연스러움이 편안하다. 숲과 사람이 자연스럽게 만들어 낸 길 위에 떨어진 대나무 잎들이 푹신한 카페트가 되어 우리를 맞이한다. 그 길을 걸으며 마치 구름 위를 떠다니는 느낌이 든다. 길동무는 대나무 잎으로 침대를 만들면 좋을 것 같다고 한다. 대나무 배게도 좋고 이불도 좋을 것이다. 대나무 숲을 지나 위태 마을에 도착했다. 일반적으로 덕산에서 위태까지가 한 코스이다. 하지만 우리는 좀 더 걸어 궁항마을까지 가기로 했다. 코스의 난이도와 거리를 고려할 때 좀 더 걸어도 무리가 되지 않고, 주어진 기간에 한 코스를 더 걸을 수 있다. 위태에서 지네재를 오르는 길은 오르막이 길게 이어진다. 오율마을까지 가면 그 다음부터는 내리막길로 궁항마을까지 연결된다.


궁항마을 숙소는 폐교를 개조해서 민박집으로 만든 곳이다. 샤워실이 외부에 있어서 조금 불편하기는 했지만 따뜻한 물이 나오니 더 이상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종을 쳐서 식사 시간을 알려준다. 어릴 적 학교 다닐 때 종소리가 주는 설렘과 긴장이 느껴지기도 한다. 종소리가 옛 추억을 소환한다. 음식은 한정식으로 매우 훌륭하다. 서울에서 2, 3만원 하는 한정식보다 훨씬 더 낫다. 국과 찌개 다양한 반찬 등이 한 상 가득이다. 막걸리도 한잔 곁들여 저녁 식사를 맛있게 했다. TV에도 소개된 집이라고 한다. 노부부의 자긍심이 대단하다. 식당 옆에는 초등학교 교실이 하나 보존되어 있다. 들어가 보니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교실 규모가 너무 작다. 예전에는 열 명 정도가 한 학급을 이루어 교실이 작았다고 한다. 어릴 적 학교는 내게 작게 느껴지지 않았다. 칠판에 사람들이 낙서를 해 놓았다. 이런 곳에 오면 자신의 자취를 남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다. 그런 낙서가 오히려 정겹다. 오늘 저녁 서울에서 길동무 한 명이 내려왔다. 반가운 얼굴을 보니 기분이 더욱 즐거워진다. 한 사람의 동참은 전체 분위기에 활력을 불어넣어준다.

%EA%B5%AC%EB%A6%84%EC%82%B0.jpg?type=w580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지리산 둘레길 7일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