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의 나 (사랑은 내리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내리사랑이 아니다

by 걷고

흔히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한다. 부모가 자식들을 돌보고, 형이 아우를 돌보고,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돌본다는 의미에서 생긴 말인 것 같다. ‘부모의 마음을 알려면 지 자식을 낳아 봐야 한다.’, ‘형만 한 아우 없다.‘ 라는 말도 있다. 결국 사랑은 위에서 아래로 베푸는 것이라 하여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생긴 것 같다. 부모님이 온갖 정성으로 자식들을 돌보고 키우시고, 형이 동생을 챙기기도 한다. 또한 조직에서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챙기고 가르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내리사랑‘이라는 말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기는 하다. 하지만 ’내리사랑‘을 강조하는 그 이면에는 베푼 만큼 돌아오는 것이 없다는 불만과 불평을 함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과연 ‘사랑은 내리사랑’만 존재할까? 그리고 영원한 ‘내리사랑’이 존재할까? 부모님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대부분 비슷할 것이다. 자식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행복을 유보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자식들을 대신해서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형이 아우를 돌보는 경우도 많고, 조직의 상사가 부하를 가르치며 함께 성장하기도 한다. 윗사람이 아랫사람들에게 그런 정성으로 대했을 때, 아랫사람들은 과연 윗사람을 무시하고 오로지 자신들만의 실리와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이 글을 쓰면서도 ‘윗사람’, ‘아랫사람’ 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불편하기도 하다. 사람들 간에 위, 아래가 있을 수 없기에. 하지만 ‘내리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기에 어쩔 수 없이 ‘위, 아래’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부모님들이 가끔 착각을 하는 경우도 있다. 사랑을 명분으로 하여 자녀들을 자기의 대리인 역할로 여기며 자신이 못 이룬 꿈을 이루길 강요한다거나, 자신들의 부족한 부분을 대신해서 보완해주기를 바라며 몰아붙이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대부분 그런 경우의 끝은 그다지 아름답지 못하다. 아이들은 성장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길 원하는 반면, 부모는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자식들에게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예전의 말 잘 듣던 아이로 돌아오기를 강요하고 있어서 마음의 골이 깊어져서 결국 남 보다 못한 사이가 되기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랑은 결코 ‘내리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흐름’이고 ‘소통’이고 ‘교류’이며 ‘순류와 역류’가 만나는 것’이라고 얘기하고 싶다. 이 세상에 ‘문제 아이’는 없고, 그런 아이를 키운 ‘문제 부모’만 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아이들의 모습은 부모 모습의 거울이다. 그래서 아이의 행실을 보면 그 부모의 행실을 어느 정도 유추해 낼 수가 있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사랑과 배려를 베풀면,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부모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표현한다. 물론 세월의 흐름에 따른 세대 차이가 있어서 서로 표현하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표현을 한다. 그 방식이 부모들의 마음에는 썩 들지 않더라도, 세대 차이를 고려해서 수용을 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행복하게 잘 지낼 수 있다. 세대 차이를 인정하는 부모의 유연한 사고방식은 나이 들어가는 어른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런 사고방식의 변화는 자식들과의 긍정적인 관계형성에 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사회의 변화에 적응을 잘 하게 되어 결국 자신들의 삶이 편안해진다.

결혼 한 딸이 출산을 두 달 앞둔 상태인데, 어제 밤에 전화를 걸어 집에 잠깐 들리겠다고 한다. 아내와 통화하는 내용을 들어보니 품질 좋은 고기가 있어서 전해주려고 오겠다는 얘기다. 아내는 딸아이 몸이 무거우니 오지 말고 둘이 사이좋게 먹으라고 말했고, 딸은 자기들 몫은 따로 두었고 야간 드라이브하겠다는 마음으로 오겠다고 서로 실랑이를 했다. 결국 딸과 사위는 밤늦은 시간에 고기를 들고 찾아왔다. 사위가 ‘고기가 좋으니 냉동에 두시지 마시고 반드시 내일 아침에 바로 구워두시면 좋아요’라고 당부를 했다.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고맙다.

아이들이 갖고 온 고기의 반을 내일 장모님에게 전해드리라고 했다. 장모님께서도 음식을 우리 몫과 손녀 몫을 따로 챙겨서 늘 준비해 주신다. 장모님께서는 말로 사랑을 표현하기 보다는 이런 담담한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신다. 말 보다는 행동이 우선이 되고, 서로 갖고 있는 것을 나누고, 힘든 시간을 묵묵히 지켜봐주고 마음으로 기도를 해 주는 것이 어른이 할 수 있는 사랑의 표현이다.

우리가 늙으면 언젠가는 아이들에게 의지를 할 수 밖에 없다. 병원에 가는 것도 혼자 가기 힘들 것이고, 사회의 발전 속도를 따라갈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의 도움을 받게 되어 있다. 다만 우리가 할 일은 아이들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을 하며 살아가는 것 밖에는 별 다른 도리가 없다. 우리가 아이들을 키웠듯이, 아이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키우며, 동시에 부모들을 보살피게 된다. 안쓰럽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그러기에 사랑은 결코 ‘내리사랑’이 아니다. 만약 아이들이 자신들의 부모를 잘 대하지 않는다면 자식들을 탓하기 이전에 자신들이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한번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내는 매주 일요일 처가에 가서 혼자 계시는 장모님을 뵙고 온다. 갈 때마다 정수기 물을 받아서 들고 간다. 결혼 초에 장인어른이 근처의 약수터에서 물을 받아 들고 오셨던 기억이 있어서 보은의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 것 같다. 정수기를 놓아 드리는 것도 방법이기는 하지만, 아내는 그런 방식으로 감사를 표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부모님의 방식을 보고 우리는 배우고 있고, 우리의 방식을 보고 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방식으로 부모님께 보은을 하고 있고, 아이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보은을 하고 있다.

‘보은’은 잘못 선택된 단어이다. ‘보은’ 보다는 ‘살아가고 있다’라는 표현이 맞다. ‘보은’은 당연한 기대감을 기저에 갖고 있어서 그 기대감이 충족되지 않으면 갈등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살아가고 있다’는 자연스러운 흐름이기에 서로에 대한 기대나 실망이 있을 수 없다. 결국 사랑은 ‘내리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소통’이고 ‘순류와 역류의 만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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