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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걸을까?

by 걷고

일본 작가 이치카와 사오가 일본 순수문학 최고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다. 선천선 근육병증을 앓아 등뼈가 휘고 인공호흡기를 써온 여성 소설가가 누워서 엄지손가락으로 태블릿 PC에 소설을 쓴다. 작가는 발표회에서 장애인에게 접근성이 떨어지는 종이책을 비판했다.

“나는 종이책을 미워했다. 다섯 가지의 건강 항목을 충족한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독서 문화를 증오한다.”라고 썼다. 눈으로 읽고 책을 들고, 책장을 넘기고, 읽는 자세를 유지하고, 서점에 가서 책을 사야 한다는 종이책의 독서 과정이 장애인에게는 큰 벽이라는 것이다. (조선일보 20230724)


이 글을 읽으며 비장애인이 장애인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며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장애인의 삶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그들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없다. 설사 이해를 한다고 해도 머리로만 이해할 뿐이다. 수개월 전에 시각 장애인과 만나 점심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음식이 나오자 어떤 반찬이 어느 쪽에 있는지 알려 달라고 해서 알려주며 그 사람을 편안하게 해 줄 생각으로 농담 삼아 한 마디 했다. “마치 왕이 식사를 하는 것 같다. 음식 위치를 모두 알려주고 어떤 음식이 나왔는지 얘기를 해야 하니.” 나중에 그 말이 얼마나 큰 실수인지 알게 되었다. 며칠 지난 후에 그 친구는 내게 다른 시각 장애인 앞에서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웃으며 조언해 주었다. 그 말을 듣고 바로 사과했다. 비장애인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상생활이 장애인에게는 넘기 힘든 장애가 된다.


일본 작가가 종이책을 미워한다는 이유와 시각장애인과의 식사 상황을 떠올리며 가장 평범한 건강이 얼마나 큰 기적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몸을 마음대로 움직인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인가? 뛸 수도 있고, 걸을 수도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인가? 누군가를 만나 얘기를 나눌 수 있고, 만나기 위해 어디든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인가? 세수하고, 밥 먹고, 영화 보고, 차 마시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인가? 일상생활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로 이미 우리는 기적이라는 큰 선물을 받은 선택된 사람들이다.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어떤 몸을 갖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결정되기도 한다. 몸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없을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되는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타인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자신의 주인이면서 주인 행세를 할 수 없을 때 찾아오는 무력감과 무망감(無望感)은 삶의 동력을 잃게 만든다.


약 2년 전쯤 걷기 위해 모인 석수역에 평상시와는 다르게 시각장애인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모두 등산복 차림으로 약간의 긴장감과 불안감, 그리고 설렘이 가득한 얼굴로 즐겁게 얘기하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후에 한 그룹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 모임은 시각장애인들과 가끔 등산모임을 갖는다고 했고 이날은 서울 둘레길을 걷는다고 했다. 그 모임의 이름을 들었지만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모여 행복하게 어울리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비록 장애인의 삶을 이해할 수는 없어도 이런 경험을 통해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체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통해서 장애인의 삶에 대한 이해를 조금이나마 더 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토요일에 경기 둘레길을 완주했다. 약 1년 3개월 간 주말에 총 45회를 길동무들과 함께 걸으며 860km에 달하는 거리를 모두 걸었다. 혼자 걷는 것도 쉽지 않지만, 함께 걷는 것 역시 쉽지 않다. 혼자 걸었다면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길이지만 함께 걸었기에 완주할 수 있었다. 또한 혼자 걸었으면 편안하게 걸울 수도 있었지만, 함께 걸었기에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하는 상황도 있었다. 결국 함께 걸었기에 완주할 수 있었고,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좀 더 성숙한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걷고 경험하고 느낀 만큼 우리는 성장하고 성숙해진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또 함께 걷는다는 것은 자신의 민낯을 볼 수 있고, 자신의 틀을 부숴버릴 수 있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어제 혼자 여유롭게 집 주변 공원을 두세 시간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경기 둘레길이 끝났다는 후련함도 있지만, 뭔가 허전함도 있다. 앞으로 어디를 어떻게 걸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된다. 신문 기사 내용이 떠오르며 걸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기적을 선물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기적을 선물 받은 사람은 선물 받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 나눠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밥 먹을 수 있고, 걸을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볼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뛸 수 있는 기적을 선물 받은 사람은 그 기적을 충분히 누릴 권리가 있는 만큼, 그 기적을 나누는 의무도 갖고 있다.


상담을 공부하고, 명상을 수행하고, 걷기를 하며 꽤 오랜 기간 준비해 온 일이 있다. 바로 일상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걷기, 명상, 상담을 접목한 심신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이다. 프로그램을 돈벌이 목적으로 사용하려는 생각을 하며 준비해 왔지만, 이제는 돈을 벌겠다는 목적은 많이 희석되었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그 일을 즐기고, 그 일을 통해 소통하고 나누는 삶을 살고 싶다. 걷기 동호회인 ‘걷기 마당’에는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리고 걷기를 통해 힘든 상황을 극복해나가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나 역시 그중 한 명이다. 자신이 힘든 상황을 겪어 본 사람들은 남의 고통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인지상정이다.

이제 선물 받은 것을 나눌 시기가 온 것 같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할지는 모르겠지만, 길동무들과 의견을 나누면 좋은 생각들이 나올 것이다. 은둔형 외톨이들과 함께 걷는 것도 좋은 생각이다. 물론 이들을 길까지 나오게 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걷는 프로그램도 생각 중이다. 발달 장애인들과 함께 걸으며 자연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싶다. 우울감이나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과 함께 걷고 느낌을 나누는 시간도 갖고 싶다. 청소년들과 함께 걸으며 이들이 사회에 좀 더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 외에도 걷기를 통해 주변 사람들과 나누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는 다양한 아이디어가 있을 것이다. 이 일 역시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함께 해야 가능한 일이다. 비장애인인 우리 역시 혼자 살아갈 수 없다. 함께 도우며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장애인, 비장애인, 한국인, 외국인, 다문화가족 등 경계를 헐어버리고 함께 살아가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걷기를 통해 방법을 찾아가면 된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이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이고 나답게 살아가는 방법이고, 나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이다. 나는 ‘나’로 살고 싶다. 길을 걷는 것은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내가 걷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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