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생긴 변화와 습관이 있다. 음악에 관한 관심과 음악을 듣는 습관이다. 신문에 나온 ‘피아니스느 키트 암스트롱 내한’이라는 기사를 읽는다. 예전이라면 보지도 않고 넘어갈 기사를 자세히 읽으며 키트 암스트롱이라는 대만계 미국 피아니스트를 알게 된다. 16세에 영국 왕립음악원을 졸업하고 4년 후 프랑스에서 수학 석사를 마친 영재라고 한다. 또한 그를 사사한 피아노의 거장 알프레트 브렌델도 알게 된다. 아직 이들의 음악을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기사를 읽으니 이들의 음악도 듣고 싶다. 취미나 관심이 한 가지 생기면 그 덕분에 새로운 분야에 대해 서서히 알아가며 나의 세상이 넓어진다. 세상은 참 넓다. 좋은 취미와 습관은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린다. ‘퇴근길 클래식 수업’(나웅준 저)과 ‘클래식 수업 1, 모차르트, 영원을 위한 호소’ (민은기 저) 두 권이다. 강단장님이 보내주는 음악을 가이드 삼아 듣고 있고, 그 덕분에 클래식 책까지 찾아서 읽게 된다.
올림픽 공원을 걷기 위해 나오면서 음악을 듣는다. 무선 이어폰을 꺼내어 귀에 꽂은 후 휴대전화에서 유튜브 앱을 펼쳐 임윤찬의 피아노 연주곡을 튼다. 음악을 들으며 걷는다. 최근에 생긴 취미이자 습관이자. 걸을 때 음악이 함께 하면 뭔가 충만한 느낌이 든다. 한 시간 정도 피아노 연주를 들은 후 음악을 끄고 몸의 감각, 특히 발의 감각에 집중하며 걷는다. 약 8km를 두 시간 동안 걷는다. 음악을 들으며 걷다가 다른 생각이 올라온다. 천천히 음악에 집중하면 생각은 저절로 사라진다. 음악과 함께 걸으며 음악 걷기 명상을 한다. 그리고 남은 한 시간 정도는 음악을 끈 후 발의 감각과 몸의 감각에 집중하며 걷기 명상을 한다. 굳이 명상이라는 말을 붙일 필요가 없다. 그냥 그렇게 음악을 듣고, 그렇게 걷는다. 명상이 일상이 된다. 일상 속 명상을 하고 있다. 명상이 삶과 분리되면 명상이 아니다. 명상이 삶 자체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일상 속 벌어지는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된다. 늘 평온한 마음을 유지한 채 하루 또 하루를 보낼 수 있다. 그래서 나날이 좋은 날이다.
공원을 걸으며 ‘음악 일기’에 대해 생각을 한다. 음악을 들으며 ‘음악 일기’ 쓸 생각을 한다. 음악을 듣는데 생각이라는 것이 끼어들어 음악을 제대로 들을 수 없게 된다. 경험과 나 자신 사이에 생각이 개입되어 나와 경험을 분리시킨다. 세상의 모든 고통은 여기서 시작된다. 음악에 집중하지 못하고 음악을 들으며 ‘음악 일기’에 무엇을 쓸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한다. 생각을 하는 만큼 음악은 나에게서 멀어진다. 음악에 대해 너무 모르고 심지어는 지식도 전무한 상태에서 ‘음악 일기’ 쓴다는 것이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샘에 물이 고이면 저절로 주변으로 흘러넘친다. 물이 채 차기도 전에 퍼 쓰면 샘 자체가 망가진다. 음악을 막 듣기 시작했는데, 음악을 듣기보다 ‘음악 일기’ 쓸 생각을 하다 보니 음악을 제대로 들을 수도 없다. 제대로 듣지도 않은 음악을 음악 일기로 쓴다는 것 자체도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걷지도 못하는 사람이 뛰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이다. ‘음악 일기’ 쓰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음악을 충분히 천천히 꾸준히 듣기로 했다. ‘음악 일기’ 쓰기를 내려놓으니 음악에 집중하며 들을 수 있게 된다.
세상에는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 너무 많다. 여행 가서 좋은 경치를 찍는 것이 아니고, 사진을 찍기 위해 명소를 찾아다닌다. 길을 걸은 후 걷기 일기를 쓰는 것이 아니고, 걷기 일기를 쓰기 위해 걷는다. 한때 이런 경험을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이 사실을 인식하고는 일기 쓰기를 포기하고 걷기에 집중했다. 어느 날 문득 걸으며 떠올랐던 생각을 걷기 일기에 쓰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일기를 쓰기 위해 걷지 않는다. 산티아고 출발 전 한 지인이 동영상 촬영을 하는 것이 좋겠다면 영상촬영 도구를 보내왔다. 조립하고 찍는 연습을 하다가 기계치인 자신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걷기 위해 산티아고 가는 것인지, 동영상을 찍기 위해 가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고 몸과 마음이 불편했다. 영상 찍기를 포기하고 그 도구를 들고 가지 않았다. 걷기에 집중하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보니 잘 내린 결정이었다. 덕분에 걷기에 집중하며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자신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돈을 벌기 위해 사는 건지, 살기 위해 돈을 버는 건지 혼란스러울 때도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이 고민은 진행 중이지만, 예전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고, 줄어든 만큼 편해지고 있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은 우리를 힘들게 만든다. 주인이 손님이 되는 이상한 상황으로 인해 삶은 고통스럽다. 우리 자신에게도 ‘참 나’와 ‘거짓 나’가 있다. ‘참 나’는 나의 본성, 실체, 주인이다. ‘거짓 나’는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자신의 허상이 주인이 되는 삶이다. 즉 내 집에 들어와 있는 손님이 또는 도둑놈이 주인 짓을 하고 있는 삶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성공이라는 명분으로 추구하는 것은 대부분 부귀, 명예, 권력, 사랑 등이다. 영화의 주제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들이 일반적인 우리네 삶의 목적이자 삶 자체 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이들 외의 삶의 길도 많이 있다. 삶의 목적과 목표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매진하면 저절로 이루어질 수 있다. 노력의 부산물이고, 과정에 충실한 덕분에 저절로 얻어지는 선물이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과정보다는 결과물을 얻기 위해 살아간다. 과정의 중요함을 모르고 결과만을 얻기 위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친다. 욕심이라는 또는 욕망이라는 도둑놈이 ‘참 나’를 시켜서 결과물만 취하라고 한다. 주인인 우리 자신은 도둑놈의 종노릇을 하며 힘들게 살아간다.
나 역시 도둑놈의 종노릇을 60년 넘게 해 오고 있고, 그 종노릇을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고 있다. 60년 이상의 세월 동안, 또는 과거 수많은 전생의 숙업으로 인해 쉽게 벗어날 수 없어서 좌절을 하기도 했고, 포기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다행스럽게 벗어나야만 된다는 생각의 불씨는 늘 간직하며 살아왔고, 지금은 서서히 그 불씨에 바람을 불어넣으며 ‘참 나’를 찾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제는 나의 주인 자리를 되찾고 싶다. 도둑놈의 종노릇은 그만하고 싶다. 떳떳한 주인 노릇을 하며 살고 싶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을 바로 돌려놓고 싶다.
어제 음악과 함께 길을 걸으며, 또 이 글을 쓰며 생각이 분명해진다. 나 자신과 경험 사이에 생각이라는 놈이 끼어들면서 삶의 고통은 시작된다. 경험을 온전히 느끼고 누리고 받아들이면 된다. 날씨가 추우면 추운 것을 받아들이면 된다. 하지만 대부분 추운 날씨에 감정을 실어 추운 날씨는 싫다. 괴롭다. 힘들다는 판단을 하며 변화시킬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오히려 자신을 더욱 힘들게 만든다. 또 다른 한 가지는 나의 주인이 되는 방법으로 주객이 전도된 상황을 원래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나의 주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종놈이 시킨 것인지 스스로 객관적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 습관이라는 종놈, 욕심이라는 종놈, 관습의 패턴이라는 종놈, 나를 피폐하게 만드는 종놈에서 벗어나 자신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고 싶다. 주인이 되면 편안해진다. 굳이 애쓰며 살아갈 필요도 없어진다. 매 순간 만나는 상황과 사람, 그리고 이들을 받아들이는 나 자신과의 사이에 생각이 끼어들지 않으면 삶은 평온해진다.
생각이 끼어들지 않게 만드는 방법이 바로 명상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 명상이다. 밥 먹을 때 밥 먹는 일에 집중하면 된다. 밥 먹다가 다른 생각이 올라오면, 빨리 알아차리고 다시 먹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먹기 명상이다. 명상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 자체도 불필요하다. 그냥 모든 생각 내려놓고 식사를 즐기면 된다. 티베트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걱정해서 걱정이 없어진다면 걱정이 없겠네.” 걱정하고 생각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과거는 돌이킬 수도 없고, 미래를 만들 수도 없다.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은 바로 지금 여기다. 명상을 해야만 하는 이유다. 아니다. 일상 속 하는 일에 온전히 집중해야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