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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고 May 29. 2024

무아(無我)에 관하여

불교에서는 삼법인(三法印)이라는 세 가지 법의 인장이 있다. 즉 이 인장이 찍혀 있으면 불교이고, 그렇지 않으면 불교라고 할 수 없다. 삼법인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개고(一切皆苦), 그리고 제법무아(諸法無我)를 말한다. 제행무상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주이멸(生住異滅)이라는 존재의 원리를 갖고 있다. 모든 존재는 유정이든 무정이든 태어나서 머물다 변한 후 사라진다. 세월의 흐름 속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사람도 물건도 감정도 생각도 생주이멸의 원칙에 따른다. 심지어 지구나 우주도 이 원칙에 따른다. 따라서 제행무상은 세상의 존재 원리이고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무상은 희망이 단어다. 자신이 처한 불편한 상황이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어둠 속에서 묵묵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또한 자신의 부귀와 권력도 언젠가는 변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좀 더 겸손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무상한 것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욕심과 집착으로 인해 괴로움이 시작된다. 일채개고다. 인간은 생로병사에서 벗어날 수 없다.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기를 바라는 욕심과 늘 젊고 건강하고 영원히 존재하기를 바라는 집착으로 인해 괴로움이 시작된다.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좋아하는 것은 잡고 싶고, 싫어하는 것은 밀어내고 싶지만 잘 되지 않아 늘 괴로울 수밖에 없다. 무상을 이해하지 못하면 괴로움은 따라서 올 수밖에 없다. 괴로움은 우리에게 큰 선물을 준다. 바로 괴로움을 통해서 마음공부 할 기회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괴롭지 않다면 종교나 수행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천상에 태어나는 것도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늘 편안한 상태에서 살기에 굳이 수행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괴로움을 바탕으로 수행을 통해 어떤 상황 속에서도 평온함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다. 수처작주(隨處作主)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상황이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상황이나 경계 속에서도 자신의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원칙은 모든 것은 원래 실체(reality)가 없다는 뜻이다. 제법무아다. 물건도 감정도 생각도 감각도 실체가 없고 단지 흐름과 변화 속에 있다.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육체나 정신 작용도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영원할 수 없다. 변하는 것은 실체가 없다는 의미고, 따라서 ‘나’라는 존재도 실체가 없다. “무아는 자아 존재에 대한 절대적인 부정이 아니라 불변하는 자아는 없다는 의미다.” (나무 위키 인용) 과연 ‘나’는 무엇일까? 지금 ‘나’라고 생각하는 ‘나’는 10년 전의 나와는 모습과 상황이 다르고, 10년 후의 나와도 모습과 상황이 다르다. ‘나’라는 존재 역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한다는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또한 ‘나’의 역할에 따라 ‘나’를 지칭하는 이름도 변한다. 회사에서는 직원이고, 집에서는 가장이고, 손자에게는 할아버지고, 친구 사이에서는 친구가 되고, 배우자에게는 남편이 된다. 회사 내에서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과장, 부장, 중역, 사장 등 부르는 직급이 변하고 그에 따른 역할과 책임 또한 변한다. ‘나’는 있지만, ‘나’의 역할과 모습과 상황은 늘 변한다. 이것이 무아의 의미다.


삼법인의 입장에서 무아를 살펴보았다. 이제는 수행의 차원에서 무아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12 연기 등 많은 불교의 교리는 수행을 위한 바탕에 불과하다. 수행이 따르지 않는 종교는 별 의미가 없다. 종교를 찾고 교리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이유는 바로 일상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평안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다. 교리에 대한 이해가 있는 상태에서 수행을 한다면 수행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삶 속에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교리에 입각해서 고민하고 이해한다면 이는 바로 수행과 직결되어 수행의 깊이를 좀 더 깊게 만들 수 있다. 수행과 무아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명상과 참선의 주제는 또는 목적은 ‘무아’인 ‘자신’을 찾는 일이다. 즉 ‘무아’를 체득하는 일이다. 보이지도 않고 존재하지도 않지만 늘 자신의 주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어떤 놈이 있다. ‘빨간 부채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 있다. 부채를 보지 말고, 부채를 들고 있는 사람을 보라’는 말은 화두공부하는 수행자에게 화두 드는 방법을 설명하는 말이다. 이휘재 또는 법천이라고 누가 나를 부르면 ‘예’라고 답한다. 그 ‘예’라고 답하는 놈이 어떤 놈일까? 내 몸이 나라면 죽어서도 답을 할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죽으면 대답을 할 수 없다. 귀도 있고 입고 있지만 대답할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바라보면 나 역시 사랑을 느낀다. 그 사랑을 느끼는 놈은 무엇일까? 나의 몸일까? 나의 마음일까? 나의 생각일까? 감정일까? 지금의 살아있는 나는 감정을 느끼지만 같은 몸을 지닌 죽은 나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무엇인가? 나의 마음이라면 과연 그 마음은 무엇인가? 지금 사랑을 느끼는 마음은 평생 같은 마음을 느낄까? 마음은 변한다. 변하는 것을 나라고 할 수 있을까? 그 변하는 것 중에 어떤 놈이 나일까? 나는 늘 변한다. 아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나’라고 생각하는 놈은 늘 변한다. 그 변하는 놈 때문에 늘 괴롭다. 그럼에도 그놈의 존재를 볼 수가 없다. 볼 수도 없고, 늘 변하는 나는 과연 누구이고 무엇인가?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무아’를 체득해야 한다. ‘나’라고 생각하는 존재가 없다면 고락 역시 저절로 사라진다. 그 원칙과 원리를 깨닫는 것이 수행이다.


오직 ‘지금-여기’에서만 ‘나’를 알아차릴 수 있다. 지금 느끼는 감정과 생각, 감각, 느낌은 알아차리면 사라진다. 알아차리기 전에는 뭔가를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나’라고 생각하지만, 알아차리면 사라지니 ‘나’라고 할 수 있는 어떤 놈도 없다. 무아다. 무아를 체득하기 위해서는 늘 알아차림 상태를 유지해야 하고, 이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마음챙김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헛된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知幻卽離(지환즉리) 離幻卽覺(리환즉각)이다. 헛된 망상을 알아차리면 사라지고, 사라지면 바로 깨달음이다. ‘지금-여기에서 알아차림을 통해  변하는 ‘라고 생각하는 ‘로부터 벗어날  있고, 이를 통해 삶의 고락에서 해방될  있다.  


요즘 일상 속에서 알아차림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침에  시간 정도 명상을 한다. 호흡에 집중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몸의  부분을 스캔하며 몸의 감각을 느끼는 수행을 한다. 고엥카의 수행방법이다. (나의 생각일 뿐이므로  글을 읽는 분들은 고엥카의 수행 방법에 대한 나의 생각을 믿지 마시고 직접 수행을 체험해 보시길 권합니다.) 감각을   세밀하게 느낄  있다면 어떤 생각이나 감정이 올라올  감각을 통해 알아차릴  있다. 생각이나 감정은 감각이 일어난 후에 느끼게 된다. 따라서 감각을 민감하게 훈련한다는 것은 생각이니 감정의 올라옴을 빨리 알아차리기 위한 방편이다. 걸으며 몸의 감각을 느끼는 연습을 한다. 발의 감각, 몸의 움직임에 관한 관찰, 향기나 바람의 촉감을 느끼기도 한다. 열린 마음으로 느껴지는 모든 것을 알아차리려 연습하고 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조차 하기 싫을 때에는 호흡을 관찰한다. 원리는 아주 쉽다. 몸이 있는 곳과 나의 마음이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 있는 곳에 마음을 두어라라는  현인의 말씀이 바로  뜻이다.


 길벗이 ‘무아 개념에 대해 물어왔다. 나의 생각을 전달하는 방법으로 말을 하는 것보다 글로 표현하는 것이 편하다.   정리된 상태에서 전달할  있다.  글은  길벗의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이다. 내가  알고 있기에  나의 답이 정답이라고 해서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 오고 알고 있는 무아에 관한 나의 의견을  글이다.  글의 내용은 시간이 지나고 나의 경험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 나는 나의 글이 정답이라는 확신이 없다. 또한 나의 결정과 판단, 생각 역시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오늘 지금  순간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이 불과할 뿐이다.  글을 읽는 분들께서 무아에 관한 나의 잘못을 지적해 주시고 가르침을 주신다면 무한한 감사함으로  가르침을 간직하고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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