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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고 Jun 02. 2024

나는 상수리나무다

상수리나무에 도토리가 열리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냥 상수리나무로 있으면 된다. 다만 나무가 건강하게 자라기 위한 환경이 필요할 뿐이다. 햇빛, 비, 바람, 뿌리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땅, 주변 나무들과의 간격 등이 필요하다. 그 환경은 나무 스스로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또한 환경을 선택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다. 매 순간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한다. 다만 한 가지 가장 중요한 원칙이 있다. 상수리나무가 다른 나무가 되려고 하면 안 된다는 원칙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망상일 뿐이다. 이룰 수도 없는 일임에도 사과나무가 되려거나 배나무가 되려고 애쓰며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며 살아간다.      


얼마 전 상담센터에 상담심리사로 지원해서 실패한 후 잠시 고민한 적이 있다. 상담 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마음복지관에 가서 담당 국장님과 실장님, 선생님들과 상의를 했다. 어떻게 상담 공부를 해야 할지, 아니면 상담을 그만두어야 할지 등 여러 고민을 털어놓고 의견을 구했다. 나는 굳이 전문가가 되고 싶지는 않지만 내담자에게 도움이 되는 상담사는 되고 싶다. 레지던트 과정도 생각해 보았지만, 지금 그 과정을 견뎌낼 에너지도 없고, 그렇게까지 모든 에너지를 쏟아가며 전문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싶지도 않다. 그분들 덕분에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한 달에 한번 정도 슈퍼비전을 꾸준히 받고, 스터디 모임에 참석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스터디 모임은 6월부터 시작하고, 슈퍼비전은 상담을 재개한 후 받으면 된다.   

   

나의 고민을 들은 후 “선생님이 행복하게 살아가면 좋겠다.”라는 국장님의 고마운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나의 행복을 걱정해 주고 바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이보다 더 좋았던 이유는 무엇을 하면 행복할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자신에게 던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약 3주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다. 나는 무엇을 하면 행복할까? 상담을 하는 상담사로 살아야만 하나? 상담을 하면서 나는 행복을 느낄까? 굳이 지금 이 나이에 뭔가를 성취하기 위해 애쓰며 살아야 할까? 내게 행복은 무엇일까?      


<내가 나를 치유한다> (카렌 호나이 지음)라는 책을 책상에 올려놓고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읽고 있다. 카렌 호나이는 현대 심리학과 임상 심리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여성 심리학자이자 정신 분석가이다. 이 책의 전반부에 상수리나무 얘기가 나온다. “상수리나무로 자라도록 도울 필요가 없고 도울 수도 없다. 인간은 잠재력의 범위 안에서 자기실현을 향해 나아가며 성장한다.” 이미 상수리나무인데 어떻게 도와서 상수리나무로 자랄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을까? 다만 자기실현을 하는데 방해가 되는 요인을 제거해주기만 하면 저절로 정상적으로 자라게 된다. 카렌 호나이에 의하면 우리는 내면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이상을 만들고 추구하며 살아간다. “이상을 좇는 나는 바로 개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이자 자신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특정 단위가 된다.” 우리는 자기 이상화라는 개념을 만들고 그것이 기준이 되어 자신에 대한 평가를 하며 살아간다. 이상을 추구하려는 시도는 대부분 실패로 끝나고 이런 실패를 보상받기 위해 또 다른 이상을 만들고 추구한다. 이런 반복된 행위와 사고로 점점 더 참된 자신과 괴리가 발생한다. 또한 설사 한 가지를 성취하였다고 해도 외면의 성공이라는 신기루를 좇아 끊임없는 충동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욕망의 추구’와 ‘마음의 평화’ 사이에서 갈등을 하며 살아간다.      


국장님의 말씀과 카렌 호나이의 책을 읽으며 나 자신을 돌아본다. 나 역시 끊임없이 이상을 만들고 찾고 이루기 위해 살아왔다. 현실적이지 않은 이상적인 자아상을 만들고 추구하며 살아오느라 정작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지 못했다. 욕망의 성취가 행복의 조건이라고 믿고 신기루를 좇아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며 지내왔다. 이로 인해 나의 내면에는 실패와 좌절의 경험이 가득 쌓이고, 불만이 가득하고, 삶의 만족도는 떨어지고, 위축된 삶을 살아왔다. 진실한 자신과 이상에 맞춘 자아상 간의 괴리는 켜져 가고 있었고, 괴리가 커진 만큼 삶의 질 또한 저하되었다.      


지금 내가 진행하고 있는 ‘걷고의 걷기학교’, 브런치나 sns에 글쓰기, 명상 수행, 상담 등의 활동도 어쩌면 이루지 못한 나의 이상을 이루며 나 자신을 세상에 또는 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이려는 시도는 아닐까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해 본다. 상수리나무가 상수리나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어리석은 행동과 결정을 하며 살아왔다. 참 어리석었다.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다. TV 프로그램이나 책, 신문을 봐도 사람의 인생 얘기에 관심을 갖고 보고 읽게 된다. 그들의 성공담을 보며 나도 성공하고 싶다는 꿈을 꾸며 살아왔다. 성공담 이면에는 힘든 시간을 보낸 내용도 담겨있다. 그들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읽으며 지금 나의 힘든 시간도 성공을 위한 발판이 될 수 있다는 이상과 희망을 품기도 했다. 그들이 사과나무이고 배나무인데 상수리나무인 나는 나를 버리고 그들이 되길 바랐던 것이다.      


이제 나에게 중요한 것은 시간과 에너지다. 그만큼 시간과 에너지가 줄어들었다는 것이고, 줄어든 만큼 사용할 시간과 에너지가 별로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제 굳이 이상적인 자아상을 만들고 이를 이루기 위해 살고 싶지 않다. 그냥 상수리나무로 살고 싶다. 나무 기둥에는 상처도 있고, 뿌리는 파여 있고, 가지는 곧 떨어질 것 같아도 나는 나의 나무로 살고 싶다. 나의 상처를 보듬고, 파인 땅을 흙으로 메우고, 떨어지는 가지를 미소 지으며 바라보고, 남아있는 가지를 자랑스럽게 보며 살고 싶다. 나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나는 무엇을 하면 행복할까?”     


길을 걸으러 나가며 또 길을 걸으며 나는 왜 걷는가라는 질문을 한다. 행복하기 위해 걷는가? 예전에는 행복하기 위해서 걸었다. 하지만 요즘은 달라졌다. 걸으면 행복해서 걷는다. 행복하기 위해 걷는 것과 걸으면 행복하기에 걷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목적이 있는 Doing Mode의 행위고, 후자는 매 순간을 즐기는 Being Mode의 행위다. 전자는 행복을 위해 무언가를 희생해야 한다. 즉 행복하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고 힘든 시간을 극복해야 한다. 하지만, 후자는 걸으러 나가는 순간 또 걷는 것 자체가 행복이다.      


나는 ‘나’라는 상수리나무로 살고 싶다. 상처는 메우되 흔적을 감추고 싶지 않다. 이 모든 것이 나이기 때문이다. 굳이 나를 감추거나 숨기고 살고 싶지 않다. 못난 모습은 못난 모습 그대로 잘난 모습은 잘난 모습 그대로 드러내며 싶다. 매 순간 나의 모습으로 살고 싶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며 살고 싶다. 어떤 결정이나 판단을 내리는 기준은 바로 나의 행복이다. 마음챙김 걷기를 하고 있고, 일상에서 매 순간 마음챙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마음챙김은 지금의 자신과 만나는 일이다. 공상과 망상에서 벗어나, 즉 이상적 자아상에서 벗어나 지금-여기에서 참된 자신을 만나는 일이다. 자신이 하는 일을 자각하고, 호흡이나 몸의 감각을 느끼며 나를 만난다. 길을 걸으며 행복하고, 길벗을 만나 행복하고, 나를 만나 행복하다. 나는 나의 상수리나무다. 이 사실 한 가지만 알아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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