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조금 지친 느낌이 든다. 뭔가를 하고 싶다는 의욕도 사라졌고, 사람들 만나는 즐거움도 별로 느낄 수 없다. 음식은 원래 배가 부르면 만족하는 사람이기에 좋은 음식이 먹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 편이다. 우울증세를 쉽게 판단하는 세 가지가 있다. 잠을 잘 자는가? 식욕이 예전에 비해 현저하게 저하되었나? 그리고 체중의 심한 변화가 있는가? 이 세 가지를 따져보니 예전에 비해 큰 차이가 없다. 열대야가 심한 요즘도 잠은 잘 자고, 식욕이나 식사량 역시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 체중은 약 2kg 정도 줄었다. 더운 날씨에 꾸준히 걷고 있어서 생긴 정상적인 변화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울증의 세 가지 기준으로 보면 우울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약간의 우울감은 있는 것 같다. 예전에 비해 일상의 즐거움을 별로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고 무감각해진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 감각은 조금 더 예민해졌다고 할 수 있고, 다만 자극에 대한 반응은 조금 느려졌고, 덜 민감해진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 그럼에도 삶의 재미를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자주 든다. 물론 예전에도 삶이 무척 재미있고 활기가 가득한 사람은 아니다. 예전에 비해서 어떤 변화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우선 사람 만나는 재미가 많이 없어졌다. 한때는 사람들을 많이 그리워하고 찾기도 했지만, 이제는 먼저 연락 와도 가능하면 약속을 만들지 않는 편이다. 따라서 모임 종류나 숫자도 많이 줄었다. 모임에 나갈 시간적인 여유가 별로 없는 개인적인 상황도 있다. 나이 들어가면서 생기는 당연한 현상이라는 생각을 한다. 오랜 기간 만난 친구들 모임에도 가능하면 참석하지 않는다. 사람이 싫은 것이 아니고 모임에 나가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보고 싶으면 언제든 연락해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서너 명 정도는 있어서 다행이다. 사람들 만나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의 의미가 많이 사라졌다. 먹고, 마시고, 얘기하는 것이 전부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재미를 별로 느끼지 못하고, 모임에 나가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는다.
사람들 만나는 것이 가끔 불편할 때도 있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 없이 자신의 뜻대로 모임이나 대화를 이끌어갈 때는 불편하다.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모임을 이끌어가는 능동적인 사람도 아니다. 대부분 잘 따라가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자신의 주장을 너무 내세우거나 모임을 좌지우지할 때는 불편하다. 그리고 대화 내용이 너무 세속적이거나 타인에 대한 비난, 자신에 대한 자랑이 넘칠 때, 그 사람을 더 이상 만나고 싶지도 않고, 그 모임에 참석하고 싶지도 않다. 이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만나는 사람과 모임의 숫자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런 사실이 내게 불편함을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홀가분해서 좋다. 요즘 들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홀로 있는 시간을 더 선호하는 사람이다.
사람 만나는 것이 불편해지고, 특별히 하고 싶은 것도 없다. 의욕이 많이 저하된 것 같고, 삶의 재미가 많이 줄어든 것 같다. 그럼에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손자 돌보기, 걷기, 글쓰기, 명상 등이다. 손자 돌보기 외의 일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은 아니다. 나를 돌보기 위한 일종의 루틴이다. ‘왜 그럴까?’라는 질문을 지난 몇 달간 꾸준히 자문해 보았다. 지금 마음속에 갖고 있는 불편함의 원인은 무엇일까? 최근에는 상담봉사활동을 하는 단체에서 상담의뢰가 들어왔고, 진행하기로 약속했는데 취소했다. 지금 상태로 상담을 진행하는 것이 나 자신과 내담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물론 사전에 얘기했지만, 진행하기로 한 상담을 취소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단체와 내담자에게는 진심으로 미안하지만, 차라리 약속을 어기고 욕을 먹는 것이 억지로 상담을 진행하는 것보다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참 다행스러운 일은 걷기 밴드를 만들어서 매주 함께 걷는 것이 삶의 큰 즐거움이 된 것이다. 이 모임 덕분에 한 주를 살아갈 힘과 용기를 갖게 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2012년에 대학원에 입학해서 불교상담을 전공했고, 2014년에 졸업 후 2015년에 한국상담심리학회 상담심리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인생 2막을 나름 의미 있게 살아보고 싶어서 선택한 방편이었다. 2009년부터 프리랜서로 활동을 시작했다. 약 15년 간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수입을 만들어내기 위해 동분서주해 왔다. 이 기간 동안 참 다양한 시도를 하며 때로는 성취했고, 때로는 좌절을 겪기도 했다. 늘 무언가를 추구하기 위해 자신을 내몰았던 것 같다. 그 무언가는 결국 경제적인 여유로움과 마음의 평온, 이 두 가지로 요약된다. 이 두 가지는 동시에 이루기 무척 힘든 일이다. 어쩌면 불가능할 수도 있다. 경제적인 성취를 이룬 사람은 더 많은 성취를 이루기 위해 달려갈 것이고, 마음의 평온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평온을 방해하는 요소를 없애거나 그런 환경과 거리를 두려는 시도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늘 대치되는 이 두 가지를 추구해 왔다. 좀 더 솔직하게 얘기한다면 경제적 풍요가 우선이었다. 만약 이를 성취했다면 아마 인생 2막에 대한 구상도, 상담 공부도, 걷기 학교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증 단 한 가지도 성취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지금도 꾸준히 이루기 위해 애쓰며 끊임없이 달려가며 지치게 되었다. 그러니 삶의 흥미나 모임의 즐거움을 느낄 여유가 사라지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이다. 언제나 이런 것을 훌훌 던져버리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 뭔가를 추구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글을 쓰다 보니 지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루지 못할 것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며 자신을 소진시켜 왔다. 그리고 에너지가 고갈되고, 지친 것을 느끼며 자신을 돌아보고 돌보기 시작한 것 같다. 좋은 징조다. 더 이상 파랑새를 좇지 않고 존재의 가치를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출발점에 서게 만들어주었다. 삶의 기준점이 과거나 미래가 아닌, 지금-여기로 변해가고 있다.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과 아쉬움이 가득한 과거나, 오지도 않는 무의미한 미래를 꿈꾸지 않고 지금-여기에서 충실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배워나가고 있다. 지침은 쉼이다. 쉼은 멈춤이다. 멈춤은 에너지의 샘에 물이 고이는 과정이다. 지금이 바로 나의 샘에 물이 고이기를 기다리는 시기다. 그러니 하던 일도 멈추고, 해야만 하는 일도 잠시 멈추고, 불필요한 약속도 하지도 않고, 자신과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멈추는 시간이 나를 채워줄 것이다.
어제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왔다. 빅터 프랭클의 저서 위주로 세 권 빌려왔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예전에 읽었던 책이지만 다시 읽고 싶었다. 빅터 프랭클은 정신과 의사로 나치 수용소에 감금되었던 시기에 로고테라피라는 의미치료를 창시한 사람이다. 그의 책이 떠올랐던 이유는 수용소의 극한 상황 상황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삶에 대한 선택과 자유의지를 지니며 살아가는 그의 모습을 통해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다. 지친 지금 이 시점에서 과거의 자신과 이별하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기 위한 삶의 의미를 찾고 싶었다. “삶의 무한한 의미에는 고통과 임종, 궁핍과 죽음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그의 생생한 말을 들으며 풍요로움과 안락함만을 추구해 온 자신을 반성한다. 삶은 편안함과 불편함, 풍요와 궁핍, 사랑과 증오, 신뢰와 배신 등 양면을 지닌 동전과 같다. 그중 한 면만을 추구하고 성취되지 못했을 때 좌절감과 불편함을 느끼며 자신을 닦달해 왔다.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모습은 과거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은 환경이든, 그렇지 않은 환경이든 받아들이며 지금-여기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면 된다. 지금-여기에서 윤회를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다. 지금 행복하다면 잘 살아온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잘못 살아온 것이다. 한 순간에 과거와 미래, 현재가 존재하니 내생의 평온함은 지금에 달려있다. 내생은 먼 훗날이 아니다. 한 호흡 끝나면 과거가 되고 다시 시작되는 순간이 바로 내생이 된다.